[삶과 문화] 성범죄 피해자가 마주하는 두 세상

입력
2019.01.23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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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심석희 선수의 성폭행 고백으로 모두가 충격에 휩싸였던 날, 동시에 일본에서도 초대형 사건이 보도됐다. 스토킹과 가택 침입의 피해자 여성이 역으로 사죄를 한 사건이다.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국내에도 제법 알려진 아이돌 그룹 NGT48의 멤버, 야마구치 마호가 주인공이다. 그녀는 한 달 전 자신의 집 문을 열자마자 두 명의 남성들에게 습격을 당했다. 집 주소를 알아내 미리 들어가 있었던 것인데, 더 충격적인 것은 집 주소와 귀가 시간을 알려 준 공범들이 같은 그룹 멤버들이었다. 도움을 호소했지만 소속사 측에서는 오히려 그녀가 피해망상이 있다며 매도했다.

NHK 메인뉴스의 보도로 사건이 드러났지만, 다음날 공연장에서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가해자나 소속사가 아닌, 피해자로 하여금 물의를 일으킨 데 대한 사죄를 하게 한 것이다. 우리로서는 경악할 만한 이 장면, 일본 특유의 ‘메이와쿠(迷惑,민폐)’ 문화다. 사회에 민폐를 끼치는 자체가 혐오시 되는 정서로, 쉽게 말해 피해자가 폭로한다 해도, 잔잔하던 사회에 파장을 만들었으므로 피해자 역시 사죄의 책임이 있다는 의미다.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계 성추행에 대해 여배우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한국에서 미투 운동이 활발했음에도 일본은 아무런 미동이 없었던 이유 중 하나다.

한국은 사정이 나을까. 이후 가해자 측의 대응을 보면 양국이 크게 다르지 않다. ‘잠잠해질 때까지만 숙인다. 뒤에서는 압박을 가한다’는 측면에서 말이다. NGT48 사건은 타임지마저 보도하며 세계가 주목했지만 사정은 여전하다. 소속사 측은 새벽 2시 긴급 인사이동을 발표해 지배인(그룹 책임자)을 빼낸 뒤 후임을 앉혔다. 그리고 7시간 뒤인 오전 9시에 사죄 기자회견을 열었다. 부임 7시간 만에 전임자의 책임을 대신 사죄하며 오열한 신임 지배인은 공교롭게도 여성이었다. 그와 동시에 무기한 공연 중지를 선언했다. 사건이 잠잠해지지 않으면 팬들은 공연을 볼 수 없게 된다는 뜻이다. 결국 미디어에 비친 사죄를 통해 대중이 사건이 일단락됐다고 믿게 함으로써 관심을 사그라지게 만들고, 뒤에서는 아쉬운 쪽이 투항하라는 압력을 넣고 있는 것이다.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드는 이 기분, 우리 사회를 한차례 지나갔던 ‘용기 낸 그녀들’의 후일담, 그리고 현 사건에 대한 체육계의 대응과 똑 닮았기 때문 아닐까. 어차피 대중은 잠잠해질 거라는 오만이 짙게 깔려 있다. 강력하지만 유효기간이 다소 짧은 국민적 공분을 간파한 듯이. 어쩌면 피해자들에게 ‘무언가 바뀔 수 있다’는 짧은 희망만 준 채 빠르게 관심이 사그라지고 나면, 끝내 혼자 싸워 내야 하는 현실은 희망 고문일지 모른다. 애당초 나서도 안 된다는 일본식 공포와는 다른 듯 같은, 한국적 메이와쿠는 아닐까.

최근 미성년자 체조선수들을 성폭행해 온 미국 국가대표팀 주치의 래리 나사르는 징역 360년형을 선고받았다. 처벌에 중점을 둔 미국식 엄벌주의의 입장이다. 물론 우리 사회의 교정 주의 관점보다 무조건 나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교정주의의 맹점을 이용해 ‘일단 잠잠해질 때까지만 숙이자’는 전략은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유효했다. 잠잠해지지 않고, 오래 냉엄히 지켜보는 시선 속에서도 그들은 이 전략을 사용할 수 있을까. 부디 이번 사건에서 우리는 예전보다 훨씬 오래, 심 선수에게 힘을 실어 주었으면 한다. 그들이 기다리는 ‘잠잠해질 때’란 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라도 하듯이.

지금도 음지에 숨어 힘겨워하는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고, 상처를 치유해 가며, 다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 그리고 가해자가 온전히 처벌받을 수 있는 세상을 위해 우리는 메이와쿠와 엄벌주의, 그 어느 쪽으로 향해야 할까. 2019년 한국 사회, 이제는 정말 선택의 분기점에 다다랐다.

장재열 청춘상담소 좀놀아본언니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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