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100년’을 살며 쌓인 철학자의 지혜, 대중을 위로하다

입력
2019.01.21 04:40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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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 <47> 김형석의 ‘백년을 살아보니’ 

대한민국 1세대 철학자로 꼽히는 김형석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 그는 대중과 소통하고 위로하며, 시대를 성찰해왔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대한민국 1세대 철학자로 꼽히는 김형석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 그는 대중과 소통하고 위로하며, 시대를 성찰해왔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식인을 분류하는 기준은 여럿이다. 무엇을 전공했는지, 어디서 공부했는지, 청중이 누구인지에 따라 구분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청중에 주목할 때 지식인은 학술 연구에 힘쓰는 ‘전문적 지식인’과 대중과의 소통에 주력하는 ‘대중적 지식인’으로 나눠볼 수 있다. 광복 이후 우리 지식사회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대중적 지식인은 어떤 이들이었을까?

지식인의 범위를 교수로 제한할 때, 문학평론가 이어령, 철학자 김형석과 안병욱, 경제학자 신영복, 미술사가 유홍준, 신문방송학자 강준만 등이 그들이지 않았을까? 이들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뜨거웠고, 대중에 대한 이들의 영향력은 작지 않았다. 나 역시 1970년대 중·고교 시절에 이어령·김형석·안병욱의 책들을 탐독했고 상당한 감동과 영향을 받았다.

오늘 다루려는 이는 철학자 김형석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하려는 것은 1960~80년대의 김형석이 아니라 최근의 김형석이다. 그 까닭은 고령화의 진전과 더불어 ‘백년을 살아보니’(2016) 등 그가 내놓은 저작들이 만들어온 잔잔한 파문에 있다. 그 자신의 말처럼 격동의 100년 동안 ‘오래 사느라 고생해온’ 김형석의 담담한 육성은 고령세대의 선 자리를 돌아보게 하고 갈 길을 굽어보게 한다.

김형석 교수를 에세이스트로 알린 책 ‘고독이라는 병’(왼쪽)과 ‘영원과 사랑의 대화’. 홍림ㆍ김영사 제공
김형석 교수를 에세이스트로 알린 책 ‘고독이라는 병’(왼쪽)과 ‘영원과 사랑의 대화’. 홍림ㆍ김영사 제공

 ◇철학자이자 에세이스트, 김형석 

김형석은 1920년 평북 운산에서 태어났다. 숭실중학교에서 공부하고 일본 조치대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광복 이후 월남한 그는 연세대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그는 철학계 1세대 교육자의 역할을 맡았다. ‘철학 개론’ 등을 통해 철학 교육의 기초를 세웠고, ‘예수’ 등을 통해 기독교의 이해를 계몽했다.

김형석이란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학술 및 종교 저작보다 에세이집을 통해서였다. 대학에 자리 잡은 후 그는 전문 연구와 함께 다수의 에세이집을 출간했다. 1959년 발표한 에세이집 ‘고독이라는 병’은 에세이스트로서의 그의 등장을 예고했다. 이어 1961년 발표한 ‘영원과 사랑의 대화’는 당대를 대표하는 에세이스트로 부상시켰다. 이후 베스트셀러들을 잇달아 내놓음으로써 1960~70년대에 대중에겐 가장 친숙하면서도 저명한 철학자이자 에세이스트로 활동했다.

나 또한 중·고교를 다니면서 김형석과 안병욱의 책들을 열심히 읽었다. 대학에 들어와 사회과학을 공부하면서 두 사람의 책들로부터 이내 멀어졌지만, 1960~70년대에 김형석과 안병욱이 우리 청소년과 시민사회에 미친 영향은 결코 작지 않았다.

김형석의 에세이들이 크게 인기를 누렸던 까닭은 뭘까? 그것은 지식사회학적 시각에서 설명할 수 있다. 1960~70년대는 산업화가 격렬히 진행됐던 시대였고, 이러한 자본주의의 물질적 팽창은 다른 한편 정신적 빈곤을 자각하게 했다. 사랑·도덕·종교의 가치를 강조한 김형석의 에세이들은 바로 이런 빈곤을 해소할 수 있는 위안의 사상, 마음의 양식의 의미를 가졌다.

예를 들어, 김형석은 ‘고독이라는 병’이라는 에세이에서 말한다. “고독의 반대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이 가장 깊은 고독을 느끼는 법이며 얻을 수 없는 사랑을 품은 이가 누구보다도 고독해지는 것이다.” 현재적 시점에서 보면 달콤 쌉싸름한, 평범한 구절이다. 하지만 전쟁의 폐허 속에 실존주의가 유행했던 1950년대 후반의 독자들에겐 위로와 용기를 안겨준 말이기도 했다.

100세를 눈앞에 둔 김형석 교수의 인생 경험과 지혜가 담긴 에세이집 ‘백년을 살아보니’. 덴스토리 제공
100세를 눈앞에 둔 김형석 교수의 인생 경험과 지혜가 담긴 에세이집 ‘백년을 살아보니’. 덴스토리 제공

 ◇100세까지 살아온 삶의 지혜 

민주화 시대가 열리면서 김형석은 과거처럼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 까닭은 정년퇴임 이후 그가 철학과 종교 문제에 천착한 데 있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민주화와 포스트모더니즘 등 새로운 제도와 문화 담론이 융성했던 데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2010년대에 들어와 그는 새로운 주목을 받아 왔다. 왜일까?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경험의 힘이다. 아흔을 넘어 김형석이 내놓은 ‘백년을 살아보니’를 위시한 저작들은 100세를 눈앞에 둔 한 원로 철학자의 인생 경험이 생생히 담겨 있다. ‘내가 그동안 살아보니 삶과 세상은 이렇더라’는 말에 귀 기울이게 됐다. 경험만큼 더 강력한 설득력은 없다.

다른 하나는 우리 사회가 ‘100세 시대’를 눈앞에 뒀다는 점이다. 100세 시대란 우리 인간의 수명이 100세에 다가서는 시대를 말한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6년 우리나라 남자의 기대수명(출생아가 앞으로 살 것으로 기대되는 연수)은 79.3세이고, 여자는 85.4세다. 기대여명(특정 연령자가 앞으로 살 것으로 기대되는 연수)의 경우, 60세를 기준으로 볼 때 남자는 82.5세이며, 여자는 87.2세다. 환갑을 맞이한 이들이 평균 20년 이상은 더 살 수 있다는 통계다.

김형석의 ‘백년을 살아보니’는 100세 시대를 다룬 기존 저작들과 다른 결과 깊이를 담고 있다. 그는 객관적 시각에서 100세 시대를 전망하고 대책을 강구하지 않는다. 주관적 입장에서 100년에 가까운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100세 시대로 나아가는 이들에게 충고한다. 행복, 결혼과 가정, 우정과 종교, 돈과 성공, 명예, 노년의 삶에 대해 그는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고 지혜를 선사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인생의 황금기는 60에서 75세 사이라고 믿고 있다. (…) 인생에서 50에서 80까지는 단절되지 않은 한 기간으로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50부터는 80이 되었을 때 나는 적어도 이러한 삶의 조각품을 완성해야 한다는 준비와 계획과 신념과 꾸준한 용기를 갖고, 제2의 마라톤을 달리는 각오로 재출발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김형석의 주장은 간명하다. 늙음은 언젠가 찾아오게 돼 있다. 늙는다는 것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젊었을 땐 용기가 필요하다면, 늙었을 땐 지혜가 요구된다. 그 지혜의 핵심은 자기의 삶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다. 우리 인간은 늙어서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고, 다음 세대에게 존경받아야 할 의무가 있다. 이 권리와 의무를 다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계속 공부를 하고, 취미생활을 하며,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100년을 살아온 경험이 생생한 지혜가 되어 김형석은 삶의 통찰을 안겨준다.

지성사의 관점에서 김형석을 이 기획에서 다루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도 없지 않을 것이다. 김형석보다 학문적 업적이 뛰어난 철학자들은 적지 않다. 그러나 지난 100년 동안 김형석만큼 대중에게 가깝게 다가선 철학자를 찾기 어렵다. 이어령과 신영복처럼 김형석은 대중의 고독에 벗이 돼주고, 대중의 삶에 지혜를 선사했다. 그는 ‘천상의 화음’이 아니라 ‘지상의 비명’에 주목하고, 그 비명하는 대중과 동행하고 대중을 위로하고 사랑한 철학자였다.

2013년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출간 당시 김형석 교수.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3년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출간 당시 김형석 교수. 한국일보 자료사진

 ◇100세 시대의 미래 

100세 시대가 이렇게 열리고 있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50%에 육박하는 노인빈곤율 등의 통계를 보면 현재 우리나라 노인들의 삶의 질은 매우 낮다. 단·중기적 시각의 노후 대책은 매우 시급한 과제다.

하지만 동시에 중·장기적 맥락의 100세 시대 개막에 대한 준비 또한 중요하다. 이제까지 우리 사회에선 교육과 취업, 은퇴라는 삶의 경로가 주어져 있었다. 그런데 100세 시대가 열리면 이 경로는 새롭게 재구성돼야 한다. 당장 60세 전후로 은퇴한 다음 남은 인생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는 고령세대에게 결정적인 실존의 문제다. 가난하고 외롭고 병든 나날로 이어지는 삶이라면 100세 시대는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다.

100세 시대 개막에 맞서서 국가의 역할과 개인의 태도 모두 중요하다. 국가는 고령사회에 대처하는 노후 복지를 강화하는 동시에 100세 시대를 예비하는 고용 및 교육 프로그램을 추진해야 한다. 개인적 차원에서도 은퇴한 다음 여생을 설계하는 것은 너무 늦다. 이른바 ‘인생 이모작 시대’가 열리는 만큼 장년세대부터 100세 인생 준비에 적극적 관심을 갖고 자기만의 삶의 방식을 마련해야 한다.

“늙는다는 것은 꽃이 피었다가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익어가는 과정이다. 그 기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지혜이다. (…) 그런 지혜의 한 가지로, 힘들여서 해야 할 일은 후배에게 물려주고 우리는 그 뒤에서 선배다운 지혜를 갖고 도와주자는 것이다.”

김형석이 전하는 말이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지나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물어야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대한민국 미래 100년에서 노년이 풍요롭고 아름답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는 지난 한 세기 우리나라 대표 지성과 사상을 통해 한국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는 연재입니다. 다음주에는 김대중의 ‘김대중 자서전’이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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