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목소리를 잃은 한국 공예

입력
2019.01.18 04:40
수정
2019.01.20 10:29
31면

최근 한 일간지에 2019년 오피니언 필진 교체 공지가 게재됐다. 40여명이 넘는 명단에는 정치학자, 의대 교수, 법조인 등 오피니언의 단골 필진은 물론, 수녀와 가수, 도서평론가와 미술평론가, 건축가 등 다양한 이력의 인사들이 포진돼 있었다.

나는 일간지나 잡지 등 매체의 오피니언 필진이 바뀔 때면 늘 유심히 살펴본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피니언의 내용보다 필자들의 명단에 더 관심이 많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많은 필진들 중에 공예 관련 인사의 이름을 발견하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대는 번번이 실망으로 끝난다. 어디에서도 공예 관련 필자를 발견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단발성 오피니언에도 공예 관련 글이 실리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오피니언뿐만 아니다. 기법이 아닌 공예 문화나 공예 에세이를 담은 국내 저자의 단행본 역시 극히 드물다.

본론을 말하자면 이렇다. 그 수많은 공예 관련 교수들과 강사, 작가들은 다 어디에 있는 것일까? 공예인들은 모두 눈이 멀고, 귀가 먹고, 입이 막힌 것일까?

많은 분야의 사람들이 다양한 매체와 저술을 통해 자신의 분야를 홍보하고, 대중을 이해시키며, 새로운 논제를 생산하는 이 시대에 왜 공예인들의 목소리는 어디서도 들리지 않는 것일까? 아마도 현재 일간지에서 공예 관련 주제를 지속적으로 접할 수 있는 지면은 3주에 한 번씩 실리는 한국일보의 이 지면이 유일할 것이다. 문화의 중요 분야이며 특히 한국문화를 대표할 가능성이 높은 공예에 대해 시민들은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터무니없이 적은 것이다.

그래서 한국 시민의 교양에 공예는 없다. 시민들은 드물게나마 공예품을 ‘구경’ 하지만 공예에 흥미를 가질 기회가 없으며, 호기심이 생기더라도 접할 글과 책이 없다. 공예가 자리 잡기 위해서는 공예품이 일상에서 소비되는 것과 동시에 시민들에게 하나의 교양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화가의 그림을 구입한 적은 없지만 미술을 교양으로 가진 시민, 자기 소유의 집은 없지만 건축에 대한 지식을 교양으로 삼은 시민이 많은 것과 비교되는 현실이다. 공예가 하나의 상품을 넘어 ‘문화’로 존재하지 못하는 이유다.

공예계에 사람이 없다, 고 말할 수는 없다. 공방 이외의 출입과 사교가 극히 적은 나에게도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이름들이 있다. 공예 관련 저서의 번역을 주도하기도 하며 깊고 폭넓은 학식을 보유한 허보윤 서울대 교수, 공예 작가이자 ‘한국공예ㆍ디자인 문화 진흥원’의 공예본부장으로 활동하며 국내외 공예 현황에 밝은 임미선 본부장, ‘멧칼프의 분리주의 ‘공예’ 개념’ 등 밀도 높은 논문을 다수 발표한 김주현 선생, 금속공예 작가이자 학자인 전용일 국민대 교수 등 쉽게 열 명이 넘는 이름들이 꼽아진다.

나는 그분들 대부분과 일면식도 없지만, 다양한 경로를 통해 그 분들이 공예와 문화 전반에 몹시 수준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문제는 역량 있는 공예인들이 공예계 내부에서만 활동할 뿐 공예의 실제 소비자이자 또 하나의 주체인 일반 시민들을 향한 소통의 목소리를 거의 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적극적으로 대중매체에 기고를 하지도 않고, 대중에 교양서로 읽힐 저술을 출간하지도 않는다.

공적인 지면에 실명을 거론하는 것이 결례임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굳이 실명을 적는 것은 그분들을 비롯한 많은 학자와 작가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대중 앞으로 나서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올해는 보다 많은 공예 관련인들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시민들에게 직접 목소리를 들려주며 소통하기를 희망한다. 공예를 하나의 교양으로 만드는 것 역시 공예인들의 의무다. 또한 귀 멀고, 입이 막힌 공예를 알아서 환대해 줄 시장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윤관 김윤관목가구공방 대표 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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