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 굴뚝 그리고 청와대

입력
2019.01.16 20:0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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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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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 전 얘기. 결혼식 하객으로 온 어르신 한 분이 조용히 말을 걸었다. “서울 와서 무슨 일을 하기에 친구들이 다 저런가?” 그러곤 검은 양복 일색인 하객들을 턱으로 가리켰다. 아하, 검은 양복에 덩치 큰 이들을 보면서 ‘어떤 수상한 집단’을 떠올렸구나. 손이 떨릴 정도로 긴장됐던 결혼식이었는데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당사자들에겐 불손하게 들리겠지만, 15일 청와대에도 일군의 검은 양복이 등장했다. 반백 노인에서 40대 장년까지,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초대받아 넓은 청와대 영빈관을 가득 채웠던 기업인 128명이었다. “상의 탈의하자”는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의 말과 함께 새하얀 셔츠를 일제히 내보인 건 물론 내 하객들과 달랐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나 정의선 현대자동차 수석부회장 같은 ‘재계의 별’이 한 자리에 모였으니, 이목이 집중되는 건 당연했다.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떤 말을 하는지, 혹시나 불만 섞인 뚱한 표정을 짓고 있지는 않은지.

기업인, 특히 이 부회장이나 정 수석부회장 같은 이에 대해 우리는 아는 게 별로 없다. 누구를 때리거나, 회사 자금을 제 지갑 쌈짓돈처럼 빼 쓰거나, 혹은 대통령을 은밀히 만나 특혜를 약속 받고 돈을 줘 수사기관에 불려나오면서 포토라인에 설 때가 아니라면 얼굴조차 보기 어려운 이들이다. 사소한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화제가 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테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아 보였다. 웃는 모습은 흡사 매일 보는 직장 동료들만큼 소탈해 보였다. 대통령에 질문을 던질 땐 면접관 앞에 선 응시생처럼 잔뜩 긴장해 ‘피식’ 웃음이 나기까지 했다. '계급장 떼고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는 자리'라는 평가처럼 ‘경제를 이끌어가는 이들’과 ‘정부를 지휘하는 이‘가 가진 소통의 자리로서는 크게 모자람이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왠지 모를 찜찜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혹시 이걸로 끝인가’하는 의구심, ‘또 다시 장막 뒤에 숨어 버릴 텐데’하는 뻔한 예상, ‘대통령 앞에서니 저런 표정과 자연스러움이 나오는 것이구나’하는 생각들 말이다.

물론 마음 한 편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선입견 탓일지 모른다. 기업을 경영하는 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직원들과 사회 전체 구성원과의 기본적인 소통에 소홀했던 이들의 이미지. ‘소통’은 힘을 가진 위로만 향할 뿐, 정작 함께 일하는 동료와 소속 직원들에게로 내려가는 일을 찾아보기 어려웠던 이들에 대한 기억이 쌓이고 쌓인 부정적인 이미지의 선입견일 테다. 과거 일부 만의 일이라고 반박할 이도 있겠지만, 그 역시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 온 ‘역사’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기업의 지분을 가진 오너 상당수가 기업을 운영하는 경영자이기도 한 우리 업계 특성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저 핑계로 들릴 뿐이다.

대통령 앞에서 기업인들이 여러 ‘앓는 소리’를 했지만, 그보다 더 한 ‘죽는 소리’가 새해 벽두부터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그들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정부가 도와줘야 한다고 할 때, 누군가는 ‘가족의 생존’을 걸고 회사에 ‘대화 한 번만 하자’고 아우성이다. 굴뚝을 오르고, 밥을 애써 굶는다.

그래서 대통령 앞에서 계급장 떼고 허심탄회하게 얘기 하듯 가장 아래에 있는 평사원들과 소통하는 편안한 자리를 더 자주 마련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본다. 아무리 회사 사정과 맞지 않는 억지 주장을 한다 하더라도 직원들을 대표하는 회사 노조와 계급장 떼고 한 번 만나볼 수는 있지 않을까. 현실성이 떨어지는 희망이라 말하는 이들이 있겠지만 굴뚝 위에서 한 겨울을 보낸 노동자도, 회사 배지를 가슴팍에 달고 지하철 인파를 뚫고 출근하는 직장인도, 모두 그들과 간절하게 소통하길 원할지 모를 일이다. 굳이 베일에 숨어 살다 대통령이나 힘 있는 이들 앞에만 나타나 상의를 벗고, 솔직해져야 할 이유가 있나 싶다.

남상욱 산업부 기자 thot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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