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재 칼럼] 같은 듯 다른 ‘내로남불’

입력
2019.01.14 18:00
30면

김태우ㆍ신재민 폭로 이ㆍ박 동일시는 과장

청렴사회 진통이나 정치적 의도는 경계해야

문정부 달라진 국민의식 못 따르면 민심이반

오구라 기조 일본 교토대 교수의 책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는 요즘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철학이 성리학인데, 그 핵심은 ‘도덕 지향성=리(理) 지향성’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사회 양극화, 경제 불평등 심화와 맞물려 ‘공정’과 ‘정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현실에 비춰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미국에서 10만부가 팔린 마이클 샌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가 한국에선 130만부 이상 판매된 것도 한국인의 도덕 지향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문재인 정부의 국정 운영을 둘러싼 비판과 대응의 본질도 따지고 보면 도덕 쟁탈전이다. 지지세력과 반대세력이 한국 사회의 최고 가치인 ‘도덕’의 깃발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벌이는 싸움이다. ‘내로남불’이 현 정부 들어 최고의 유행어가 된 것은 이런 현상의 한 단면이다. “혼자 도덕적인 것처럼 하더니 너희는 뭐가 다르냐”는 게 모든 공세의 시발점이다.

문재인 정부가 공격받을 이유와 근거가 적다고 할 수는 없다. 청와대 권력 과잉 행사, 고위공직자들의 부도덕성, 공공기관 낙하산 인사 등은 ‘위선적’이란 말을 들어도 싸다. 적폐청산 수사 과정에서 나타난 검찰의 무리한 수사방식도 예전 ‘칼잡이’ 버릇을 방치하거나 즐기다시피 한 정권에 책임이 있다.

하지만 손가락질 받는 대상에는 실제 이상으로 과장, 왜곡된 사례가 적지 않다. 논란이 되는 웬만한 사안은 모두 ‘내로남불 프레임’에 얽어 매 공세를 퍼붓는 데서 생기는 부작용이다. 특히 정치적 의도를 가진 보수야당의 흠집내기는 정확한 실상 파악을 어렵게 하고 여론을 오도한다. “그 놈이 그 놈”이라는 식의 정치 혐오를 확산시키고 민주주의 발전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블랙리스트’와 ‘민간인 사찰’ 의혹을 폭로한 김태우 검찰 수사관을 보자. 대검 조사에서 드러났듯이 그는 승진 청탁, 뇌물 골프, 수사 개입 등이 확인돼 해임 징계가 확정됐다. 이런 혐의로 청와대에서 방출돼 감찰까지 받게 되자 자신이 수집해온 첩보를 폭로했다. 폭로의 동기보다 내용의 사실 여부가 더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배경을 무시하고 ‘공익제보자’를 넘어 ‘의인’으로까지 미화하는 것은 지나치다.

폭로 내용을 놓고 박근혜ㆍ이명박 정권과 다를 바 없다는 주장도 이만저만한 비약이 아니다. 정부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문화예술계 등 각 분야 인사 명단을 만들어 지원에서 제외한 것과, 환경부 산하기관 임원들의 사퇴 여부 등을 파악한 것을 똑같이 블랙리스트로 치부하는 것은 사실 왜곡에 가깝다. 상부 지시 여부는 수사에서 밝혀지겠지만 이명박 정부 시절 정부 비판 동영상을 올렸다고 민간인을 사찰하고 사업까지 접게 만든 것과 김 수사관이 수집한 일부 민간인 동향을 같은 ‘민간인 사찰’로 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신재민 전 기재부 사무관의 ‘국채발행 외압 주장’은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볼 때 정책 결정 과정에서의 불투명과 부조리 이상을 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검찰 고발이라는 정부의 수준 낮은 대응은 문제지만 적어도 ‘박근혜 정부에 덤터기 씌우기’는 사실이 아닌 듯싶다. 이 정도라면 정치 공방이 아닌 합리적 논쟁으로 풀어나가는 게 옳다.

김 수사관과 신 전 사무관 논란은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진통이다. 국민 의식은 달라졌는데 권력을 가진 이들이 아직 정신을 못 차려서 나타난 현상이다. 대통령 탄핵과 적폐청산을 거치며 우리 사회의 도덕적 수준은 몇 단계 높아졌다. 30여년 간 가디언과 더 타임스 서울특파원을 지낸 영국인 마이클 브린은 지난달 출간한 ‘한국, 한국인’에서 “한국에서는 어떤 쟁점에 대한 대중의 정서가 임계질량에 달하면 야수로 변모한다”고 썼다. 그가 말하는 야수가 민심이고, 그 기반은 도덕과 정의, 공정이다.

‘수가재주(水可載舟) 역가복주(亦可覆舟)’란 말처럼 문재인 정부를 띄운 것도 민심이지만 뒤집을 수 있는 것도 민심이다. 문재인 정부가 이런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다.

수석논설위원 cj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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