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 이상한 섭외

입력
2019.01.14 19:00
수정
2019.01.15 19:02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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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그룹 방탄소년단이 지난달 일본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에서 열린 '2018 엠넷 아시안뮤직 어워드'에서 공연하고 있다. CJ E&M 제공
아이돌그룹 방탄소년단이 지난달 일본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에서 열린 '2018 엠넷 아시안뮤직 어워드'에서 공연하고 있다. CJ E&M 제공

“최근 1~2년 사이 가장 좋았던 공연이 뭐예요?” 대중음악을 담당하다보니 지인들에게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 똑같은 답을 했던 것 같다. “나훈아 공연요.” 2017년 11월 서울 송파구 올림픽홀. 나훈아의 쇼맨십은 탁월했고, 공연엔 이야기의 기승전결이 뚜렷했다. 그의 쇼에 놀라 고개를 저으며 감탄사를 연발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기자는 암표상과의 경쟁을 뚫고 티켓을 직접 예매해 공연을 봤다. 나훈아 측은 모든 언론에 취재용 공연표를 단 한 장도 제공하지 않았다. 나훈아는 언론과 관계 맺기를 꺼리는 가수로 유명하다. 그런데도 나훈아의 공연장을 찾은 이유는 그에 대한 호기심이 컸기 때문이다.

2010년 어느 날. 나훈아의 이름은 김용철 변호사가 쓴 ‘삼성을 생각한다’란 책에서 엉뚱하게 튀어나왔다. 나훈아가 삼성가에서 연 연회의 초청을 거절했다는 내용이었다. ‘난 대중예술가라 개인이 아닌 공연 티켓을 산 관객 앞에서만 노래한다’는 게 나훈아의 공연 거절 이유였다고 한다. 나훈아는 2002년 평양 단독 공연 제안도 고사했다.북측이 한국 공연 스태프와 악기의 반입을 불허해서였다. 1969년 나훈아 데뷔 무대부터 그를 지켜봤던 공연기획자 남강일씨가 들려준 얘기였다. 돈과 명예가 따르더라도 정식 무대, 그리고 제대로 장비도 갖춰지지 않은 곳에선 노래하지 않겠다는 소리꾼의 고집이었다. 나훈아가 달리 보였다.

섭외도 때(Time)와 장소(Place), 상황(Occasion)이 중요하다. 요즘 정치권과 대중음악계에서 ‘TPO 문제’가 새삼 화제다. 안민석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장이 아이돌그룹 방탄소년단의 평양 공연을 추진하겠다고 밝혀 논란이 인 탓이다. ‘정치적 이유로 가수를 동원하는 건 전체주의 체제에서나 있을법한 일’이란 게 비판의 요지다.

지난해 4월 또 다른 아이돌그룹 레드벨벳은 평양 공연 ‘봄이 온다’에 참여했다. 레드벨벳의 방북에 당시 논란은 일지 않았다. 똑같은 아이돌그룹인데 왜 북한 공연 추진을 두고 이렇게 극과 극의 반응이 나오는 걸까.

섭외 방식에 문제가 있다. 안 위원장의 방탄소년단 평양 공연 추진 보도에 방탄소년단 소속사인 빅히트엔터테인먼트(빅히트)는 “노코멘트”로 일관했다. 양측 사이 평양 공연 협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북한 공연은 아이돌그룹에는 부담되는 행사다. 언제 정치적 역풍을 맞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서 안 위원장이 빅히트와 협의를 끝내지 않고 방탄소년단 공연 추진 계획을 발표하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방탄소년단이 떠안게 된다. 일방적이고 위력적으로 보이는 섭외는 구설을 낳을 수밖에 없다. 박근혜 정부 시절 문화계 ‘블랙리스트’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현실에선 더더욱 그렇다.

‘탈권위’를 기치로 내세운 정부에서 국가 주도의 문화 행사가 자주 기획되는 건 아이러니다. 세계 유일의 냉전과 분단이란 한반도의 정치적 특수성으로만 덮어 넘길 문제는 아닌 듯싶다.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이 정상회담을 할 때 서로 대중가수 공연단을 꾸려 양국에서 국가주도의 평화 공연을 열었던 사례를 보지 못했다. 옛 서독 정부가 동독과 평화 협상을 하는 만찬에서 자국의 인기록그룹 스콜피온스를 불러 ‘윈드 오브 체인지’를 연주했다는 얘기도 들은 적 없다. 반대로 기타리스트인 이병우는 지난 4월 열린 남북정상회담 만찬에서 ‘새’를 연주했다. 북한과 딱히 연결고리도 찾을 수 없는 아티스트의 공연은 자연스럽게만 보이지 않았다. 방탄소년단과 안 위원장이 그들의 공연을 염두에 뒀다는 평양공동선언 1주년 기념 행사와는 어떤 접점이 있을까.방탄소년단의 인기외엔 답을 찾을 수 없다.

남북 정부 주도의 공연 진행 양상을 보면 중세의 궁정 만찬이 떠오른다. 그래서일까. 요즘 중세의 성 모양을 한 한국의 결혼식장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구시대적 권위를 앞세운 기괴함과 함께.

양승준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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