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설정

당근은 정말 아무 맛이 나지 않을까. 당근도 ‘맛’으로 먹을 수 있다. 당근은 단맛과 짠맛의 세계를 동시에 평정할 수 있는 식재료다. 게티이미지뱅크

한 주 쉬었으니 다시 끓이고 굽고 찌는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무심코 산 당근에 요즘 나는 시쳇말로 ‘꽂혀’ 있다. 당근은 애증의 식재료이다. 왠지 꼭 먹어야 할 것 같지만 조리를 잘하기가 어렵다. (오늘 소개할 내용대로) 설사 잘 익히더라도 당근 자체가 맛이 없는 경우가 99%이다. 대체로 아무런 맛이 나지 않는다. 당근의 맛이란 무엇일까. 좋고 나쁨을 따져보기 전에 그림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당근이라고 하면 김밥만 떠오르는 사람이 많겠지만, 요리부터 디저트까지, 활용할 방법이 많다. 게티이미지뱅크
무(無)맛의 당근, 맛있게 먹으려면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나는 대체로 당근에 무심해졌다. 팔리는 여건도 도움이 안 된다. 이파리가 달린 당근을 보거나 산 적이 있는가. 주황색 이외의, 노란색이나 보라색 당근을 본 적은 있는가. 싱싱하고 표면마저 반질반질해, 그러면 안 되지만 진열대에서 한 개를 쑥 뽑아내 말처럼 우적우적 씹어 먹고 싶어지는 당근을 본 적이 있는가. 적어도 한국에서는 보기 어려운 광경이다. 그 길고 푸른 윗동이 완전히 잘려 흙이 묻은 채로 진열대나 상자에서 뒹군다. 손에 흙이 묻지 말라고 감자와 나눠 쓰는 집게까지 갖춘 마트에서 당근이 굴욕당하는 흙빛 광경 말이다. 

그래서 동네의 소위 친환경 유기농 식품점에서 아무 생각 없이 집어 든 당근이 충분히 달고 맛있었을 때, 나는 흥분했다. 그 동안 먹었던 모든 맛있고 아름다운 당근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세 개를 한 끼에 다 먹고는 다음날 또 찾아가서 샀다. 그리고 계산하는 와중에 직원에 흥분된 말투로 주절거렸다. “이 당근 진짜 맛있더라고요.” 그리고 그들은 대체로 심드렁했다. 당근에 대한 불신인지 나를 향한 불신인지는 모르겠지만 겸연쩍어져 당근과 염장 다시마 등등을 주섬주섬 챙겨 뒷걸음질 쳐 가게를 빠져나왔다. 이후 일주일에 두세 번은 들러 당근을 샀다. 3개 2,980원인 무농약 당근이었다.  

당근도 ‘맛’으로 먹을 수 있는 식재료이다. 더군다나 짠맛과 단맛의 세계를 동시에 평정할 수 있는 능력도 갖추고 있다. 끼니 음식은 물론 디저트도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다. 답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당근 케이크 말이다. 짠맛에서 단맛으로 옮겨 가는 현대 식사의 순서, 혹은 위계를 감안한다면 끼니에 먹을 당근부터 살펴보아야 맞겠지만, 요리의 공정과 효율을 따지자면 일단 디저트부터 만드는 게 순서이다. 재료를 수합하고 오븐에 굽고 먹을 수 있도록 완전히 식히는 동안 끼니 음식을 만들면 된다. 

설탕이 부족했던 시절엔 단맛이 나는 당근으로 케이크를 만들었다. 게티이미지뱅크

당근 케이크는 나름 유서 깊은 디저트이다. 중세의 당근 푸딩을 뿌리로 19세기 중반부터 케이크 형태로 등장하기 시작해 세계 2차 대전 당시 영국에서 사랑받았다. 당근이 적극적으로 쓰인 이유를 짐작하기가 어렵지도 않다. 설탕이 부족했으니 설탕의 대체재로 쓴 것이다. 비트나 즙으로 색을 내는 레드 벨벳 케이크와 같은 뿌리를 나눠 가진 셈인데, 전쟁도 끝나고 설탕이 흔해진 현대에서 둘의 길은 갈렸다. 레드 벨벳 케이크는 이제 설탕과 버터 등으로 만드는 기본적인 케이크에 코코아가루와 식용 색소 등으로 물을 들이는 반면, 당근 케이크는 여전히 진짜 당근으로 만든다. 

이런 당근 케이크의 현실이 앞뒤가 안 맞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어쨌든 설탕은 중립적인 단맛을 지니고 있는 식재료이고 제과제빵의 기본이자 핵심이다. 부족함이 없는 시대에 굳이 당근을 쓸 필요가 있을까? 굳이 꼽자면 당근 특유의 향일 텐데, 실제로 밖에 나가 먹어보면 당근에서 아무런 맛이 안 나듯 당근 케이크에서도 아무런 맛도 향도 나지 않는다. 만들기가 딱히 어렵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크림 혹은 아이싱을 바르면 꽤 그럴싸해 보인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사진 잘 나오는 순서로 인기를 누리는 디저트 세계에 널리 퍼진 덕분에 찾아 먹기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당근 맛이 ‘당근’ 나지는 않는다. ‘이러면 굳이 당근을 쓸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한국 당근이 대체로 그다지 맛있지 않다는 점을 감안해도 맛이 없다. 

당근 케이크에는 정말로 당근이 들어간다. 당근을 상자형 강판에 굵게 갈아 반죽에 첨가한다. 게티이미지뱅크

무엇이 문제일까. 이름만 당근 케이크인 것이 문제가 아닐까? 팔이 떨어져라 당근을 상자형 강판에 갈아 쓰는 레시피로 당근 케이크를 구워 먹어본 뒤 그런 의심을 품게 되었다. 약간 모순 같지만 가뜩이나 맛없는 당근을 별로 안 써서 더 당근 맛이 안 나는 당근 케이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모범 답안은 한 가지이다. 당근 케이크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도록 당근을 많이 써야 한다. 물론 한계는 있다. 수분이 많이 나오는 채소이므로 어느 지점을 넘으면 물기가 축축한 괴식이 되어 버린다. 무시루떡을 기억하는가. 쌀가루와 더불어 채친 무를 시루에 안쳐 찌면 무가 익으면서 보통 시루떡보다는 좀 더 부드러운 떡이 된다. 다만 무의 양 조절에 실패하면 질척한 곤죽이 되어 버린다. 채소가 익으면서 단맛과 특유의 질감을 불어넣는다는 원리를 감안해 당근 양의 임계점을 지켜주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역시 해답은 제과제빵의 세계에서 가장 유용한, 정확한 레시피이다. 웬만하면 실패하지 않을 레시피를 준비했으니(박스 참조) 한 번 시도해보자. 

샐러드나 조림으로 활용

케이크를 구워 식히는 동안 끼니로 먹을 당근을 여유롭게 준비할 수 있다. 일단 케이크를 만드느라 굵게 갈아낸 당근을 알뜰하게 쓸 수 있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다. 갈아낸 당근 위에 소금을 솔솔 뿌려 30분쯤 살짝 절였다가 쟁반에 깐 종이 행주 위에 한 켜로 고르게 넌다. 그 위에 종이 행주를 한 켜 더 올려 손바닥으로 가볍게 눌러가며 물기를 뺀다. 당근 특유의 뻣뻣함과 날것의 느낌은 가셔 낸 한편 아삭함은 그럭저럭 남아 있으니 웬만한 샐러드에 무리 없이 초대할 수 있다. 채 썬 오이와 함께 좋아하는 드레싱에 버무려도 좋고, 올리브를 숭덩숭덩 썰거나 다져 당근 위에 솔솔 뿌려 가볍게 섞어 먹어도 맛있다. 둘 다 좋지만 그린 올리브보다는 블랙 올리브가 조금 더 잘 어울린다. 당근의 단맛과 올리브의 짭짤함이 밀고 당기며 입맛을 돋워 준다. 

굵게 간 당근의 물기를 살짝 제거하고 소금에 절이고 기호에 따라 드레싱에 버무려 먹으면 한 끼 식사로 훌륭하다. 게티이미지뱅크
고기 조림 요리에는 당근이 필수 재료이다. 장시간 조리면 쉽게 물러져 고유의 맛과 식감을 잃을 수 있다. 10~20분간 따로 익히는 것이 좋다. 게티이미지뱅크

샐러드보다 더 당근다운 당근을 먹고 싶다면 조림이 있다. 그런 당근이라면 흔하지 않은가? 당근은 무와 더불어 한식 갈비찜의 필수 재료이다. ‘닭볶음탕’이라는 해괴망측한 명칭으로 강제로 ‘순화’된 닭도리탕에도 쓰인다. 다른 식문화권을 살펴 보아도 당근은 대체로 스튜를 비롯한 같은 원리의 조리법에 쓰인다. 출발점은 바람직하나 도착지점은 사뭇 다른 것이다. 갈비찜(사실 조림)은 소의 갈빗살, 즉 호흡에 쓰여 운동이 많은 부위인 흉곽을 부드러워질 정도로 오래 푹 익혀 먹는 음식이다. 당근이 무른 채소는 아니지만 너무 오래 끓이면 곤죽이 되어 버릴 수 밖에 없다. 딱딱한 생당근도 먹기 어렵지만 이렇게 물러터져도 소위 ‘재료 본연의 맛’을 완전히 잃어버린다.

당근을 고기로부터 독립시키면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다. 당근도 행복해지고 사람도 ‘당근’ 행복해진다. 방법도 익숙한 갈비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당근을 조금만 더 이해하면 된다. 당근은 50~70도에서 펙틴 메틸레스테라제(pectin methylesterase, PME)라는 효소를 활성화시켜 펙틴이 칼슘 이온과 결착되도록 돕는다. 그 결과 펙틴이 강화되어 높은 온도에서 익힐 때처럼 곤죽이 되지 않고 익는다. 1시간씩 은근히 조리는 체계적인 레시피가 있지만 굳이 필요하지 않다. 그저 당근을 씻어 껍질을 벗기고 먹기 좋은 크기로 썬다. 당근은 대체로 원뿔형이므로, 고른 조리를 위해 크기보다 부피가 최대한 일정하도록 썬다. 

썬 당근을 냄비에 담아 물을 붓고 소금을 넣고 끓인 뒤 건져내 올리브 등과 함께 먹으면 맛있다. 블랙 올리브가 특히 더 잘 어울린다. 게티이미지뱅크

썬 당근을 냄비에 담아 물을 자작하게 붓고 소금을 두 자밤쯤 넉넉히 더해 중불에 올리고 뚜껑을 덮는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불을 최소로 줄여 물이 끓을락 말락한 상태로 유지하고, 뚜껑은 숨통이 트이도록 약간 열어 냄비에 걸쳐 놓는다. 타이머를 맞춰 10분 익힌 뒤 상태를 파악한다. 포크로 당근을 찔렀을 때 어느 정도 저항이 있으면 적절히 익은 것이다. 크기와 화력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10~20분이 걸린다. 다 익으면 불에서 내려 당근만 건져낸다. 남은 열에 더 익다가 물러질 수 있으니 찬물로 한 번 헹궈줘도 좋다. 이 사이에서 딱 기분 좋게 씹히도록 익은 당근은 모든 고기에 잘 어울리지만 특히 양고기와 먹으면 맛있다. 물론 고기를 굳이 보좌할 필요 없이 독립적으로 먹어도 좋다. 좋아하는 식초로 만든 비네그레트(식초에 허브를 넣어 만든 샐러드용 드레싱)를 끼얹고 앞에서 언급한 올리브, 피스타치오 등을 솔솔 뿌려주면 한결 더 맛있다. 아무것도 없다면 마요네즈에만 찍어 먹어도 훌륭하다. 

요령을 이해했다면 다시 고기요리의 당근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갈비찜이라면 갈빗살과 시차를 많이 두어, 즉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당근을 국물에 익히면 똑같이, 곤죽 아닌 상태로 익힐 수 있다. 카레를 비롯해 어떤 스튜나 국물 음식에도 적용시킬 수 있는 원리이다. 만약 당근의 단맛 자체를 좀 더 적극적으로 음식 혹은 국물에 불어 넣고 싶다면 아예 ‘투 트랙’으로 가는 게 훨씬 더 바람직하다. 잘게 다져 볶다가 형체가 사라질 때까지 끓이는 한편, 그렇게 맛을 들인 국물에 썬 당근을 은근히 끓여 마무리한다.  생당근은 씹기가 힘들어서라도 두세 쪽 먹으면 물리지만 이렇게 삶은 당근은 한 끼에 두세 개도 너끈히 먹을 수 있다. 새해 목표로 ‘야채 많이 먹기’를 꼽았다면 놀랍게도 당근으로 시작할 수 있다. 

단맛이 나는 당근은 디저트로 활용하기에도 좋다. 당근 케이크가 대표적이다. 게티이미지뱅크
당근케이크 만드는 법

재료

밀가루(중력분) 350g

껍질 벗긴 당근 450g

백설탕 300g

흑설탕 100g

소금 ½ 작은술

계란(대란) 4개

식용유(카놀라 등) 340㎖

베이킹파우더 1 ¼ 작은술

베이킹소다 1 작은술

계피가루 1¼  작은술

너트메그 ½ 작은술

정향가루 ⅛ 작은술 

크림치즈 

오븐을 175도로 예열한다. 30x20㎝ 안팎의 틀의 안쪽에 버터나 기름을 골고루 펴 바르고 바닥에 유산지를 깐다. 큰 대접에 밀가루, 베이킹소다와 파우더, 향신료 가루, 소금을 더해 거품기로 잘 섞어 마른 재료를 준비한다. 다른 대접에 계란을 깨 담고 흑백설탕과 식용유를 더해 가벼워지고 거품이 올라올 때까지 거품기로 휘저어 올린다. 상자형 강판이나 푸드프로세서 등으로 굵게 갈아 낸 당근과 마른 재료를 더해 골고루 잘 섞어 팬에 담는다. 이쑤시개로 반죽을 찔러 보았을 때 깨끗하게 빠져나올 때까지, 오븐에서 35~40분가량 굽는다. 2시간 정도 식혔다가 양껏 썰어 크림치즈를 적당히 발라 먹는다. 

*본 레시피는 내가 2005년에 제과제빵을 독학할 때부터 참고한 요리책 ‘쿠킹 일러스트레이티드’의 레시피를 참고하여 재료의 양과 단위 및 조리법을 한국의 상황에 맞게 조정한 것임을 밝힌다. 향신료는 취향에 따라 가감할 수 있지만, 빠지면 케이크의 맛이 훨씬 밋밋해진다.

음식평론가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