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영혼, 의지 없는 지자체 저출산 업무

입력
2019.01.11 04:40
31면

연말이 되면 바빠지는 공무원 업무가 하나 있다. 이른바 불용(不用) 예산 소진이다. 한쪽에서는 예산이 부족해서 국공립 어린이집ㆍ유치원을 만들지 못한다 그 때문에 비리 유치원 원장들의 원 폐쇄 위협에도 부모들은 눈 깔고 숨죽여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희한하게 연말만 되면 사방에서 보도블록을 뜯어내고 도로 포장 공사를 한다. 공무원들 입장도 이해는 할 수 있다. 안 쓰고 남은 예산이 없어야 한다. 사람들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당장 뜯어고치면 예산을 쓴 생색도 나고 본인 업무 평가도 좋아진다. 반면 국공립 돌봄ㆍ교육시설 건립은 지자체장 임기 이전에 근사한 개소식 테이프 끊는 광경을 만들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 그래서 업무 평가에 별 도움이 안 된다.

이런 주장에 대해 노후 도로나 시설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려면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사업이라는 항변을 할 것이다. 맞는 말일 수 있다. 게다가 어떤 경우에 멀쩡한 보도블록이나 도로를 뜯어낸 것인지, 아니면 진짜 보수가 필요해서 한 공사인지 이른바 전문가적 판단을 앞세운 논쟁이 벌어지면 누가 옳고 그른지를 가리기 어려운 상황이 된다. 그러니 보도블록을 뜯어내고 도로를 보수하는 것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겠다. 다만 진정 지자체가 저출산으로 인한 소멸 위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혹은 소멸까지는 아니더라도 저출산이 지역사회의 지속가능 발전에 심각한 위기 요인이라고 본다면, 보도블록 하나 다시 까는 것조차도 아이를 낳고 돌보는 가족을 생각할 정도로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는 문제 제기를 하고자 한다.

자동차가 다니는 길은 충분히 도로 다이어트를 해서 좁힐 수 있고, 그 공간을 활용해 유모차가 다니지 못하던 좁은 인도를 넓힐 수 있다. 그러나 도로는 도로대로, 인도는 인도대로 그냥 그 상태에서 뜯어고친다. 그러다보니 보도블록은 새 것이 되지만 유모차나 휠체어는 여전히 지나다닐 수 없다. 새롭게 포장한 도로에서 자동차가 더 신나게 달리다 보니 보행자 사고 가능성만 높아진다. 연말이 되고 예산이 남을 때 늘 하던 일이라서 그대로 하지만, 지금까지 해 오던 내 업무를 어떻게 가족 친화적, 사람 친화적으로 바꾸어 볼까는 생각하지 않는다. 걷고 싶고 살고 싶은 지역사회로 만들지에 대한 발상의 전환은 남의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어쩌다 한 번 간 해외연수인지 여행에서 자동차에는 불편하고 보행자에게 친화적인 선진국 마을 모습을 보고 왔지만, 그걸 연수보고서에 담을 능력이나 의지는 없다.

업무 때문에 식당 위생 점검을 나가긴 하겠지만, 부모가 어린아이를 데리고 와서 편하게 밥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의 모습은 상상을 하지 못한다. 출산 장려금으로 뿌릴 돈은 어떻게든 마련하지만, 지역사회 가구업체를 활용해서 식당에 아기 의자를 보급하는 사업에 대한 생각은 없다. 전통 재래시장 살리기 사업을 주관한다면서 자동차를 근처에 마구 주차시키게 해서 어린아이들의 교통사고 위험은 높인다. 그러나 지자체 예산으로 시장 입구에 어린이용 쇼핑카트를 배치해 가족이 함께 쇼핑하는 재미를 높일 생각은 못한다. 의지도 없고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저출산이 지자체 소멸로 가는 위기라고 하면서도 저출산 대응 정책 및 관련 사업은 인구정책과나 여성가족과 정도 소관이다. 이 분야 담당 공무원들이 지금까지 해 오던 출산 장려금 지급, 미혼남녀 소개팅 사업 등 ‘출산 장려 사업, 저출산 극복 사업’을 하면서 보직 변경을 기다리는 사이, 지자체의 나머지 부서들의 ‘가족이 살만한 지역사회ㆍ마을 만들기’는 어쩌다 스쳐 지나가는 해외연수 주제로 남을 뿐이다. 지자체가 극복할 위기는 저출산이 아니다. 급변하는 환경 변화 속에서 가족이 살만한 마을과 지역사회를 만들려는 의지와 능력이 없이 지금까지 해 오던 일만 하려는 지자체의 업무 구조 자체가 위기다.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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