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언제까지 성폭력 피해 여성의 ‘고통스러운 용기’에 의지할 텐가

입력
2019.01.1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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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체육관광부가 9일 체육계 성폭력 근절을 위한 대책을 발표했다. 전날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가 조재범 전 코치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체육계 성폭행 사건이 수시로 발생했는데도 제대로 사건 예방과 선수 보호를 하지 못한 정부와 체육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문체부는 대책에서 성폭력 가해자 처벌을 강화, 영구제명 조치 대상이 되는 성폭력 범위를 종전보다 확대하기로 했다. 현재 강간, 유사강간 및 이에 준하는 성폭력으로 제한돼 있는 영구제명 요건에 ‘중대한 성추행’도 포함키로 한 것이다. 성폭력 관련 징계자의 국내외 체육 관련 단체 취업도 막고, 민간 주도의 비위 근절을 위해 체육단체 전수조사도 실시한다.

그러나 주종관계에 가까운 사제관계, 동업자의 비리는 대충 덮고 넘어가려는 체육단체의 ‘암묵의 카르텔’ 관행이 만연한 상황에서 이 정도의 뒷북 대책으로 체육계의 성폭력을 뿌리 뽑을 수 있을지 미지수다. 더욱이 성적 지상주의를 빙자한 체벌에 이은 성폭력은 몇몇 지도자 개인의 일탈 차원을 넘어 폐쇄적인 체육계의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한다. 심석희는 만 17세(고2)로 미성년자이던 2014년부터, 태릉ㆍ진천선수촌 라커룸 등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시설에서 4년간 성폭행을 당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선수 생활을 지속하고 싶으면 내 말을 들으라”는 조 전 코치의 협박 때문에 피해 사실을 밝히지 못했다. 성폭행 사건을 폭로하기까지는 무려 5년이 걸린 셈이다.

어린 국가대표 선수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체육계는 무얼 하고 있었는지 통탄스럽다. 주변 인사들이 전혀 몰랐는지, 아니면 동료 선후배의 가해와 피해에 모두 ‘침묵의 동조자’가 됐던 것인지 규명할 필요가 있다.

체육계 성폭력 사건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지금껏 검찰 등 권력기관, 문화예술계, 교육기관 등에서 드러난 것만도 우리 사회에 성폭력이 만연해 있음을 방증한다. 상관의 성추행 사실을 드러낸 서지현 검사의 용기가 ‘미투(Me Too)’ 운동에 불을 지핀 지 1년이 지났지만 갈 길은 멀다. 오랜 고통 끝에 용기를 낸 심석희의 외침이 권력형 성폭력 척결로 이어지도록 정부와 사회 전체가 호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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