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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부르는 삼월의 노래] <2> 불타오른 송산면의 삼월
군중에 총 쏜 日 순사 처단… 홍면옥ㆍ왕광연 등 28명 6월~15년刑
일제 방화로 마을 쑥대밭… 잔인한 고문ㆍ보복 살인에 6명 순국
‘총 맞고 일제의 치료 거부’ 홍면옥 지사, 월북 이유로 서훈 못 받아
[저작권 한국일보]그래픽 강준구 기자

정확하게 형무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약 9년 만에 출소한 할아버지는 앓아 누우셨고 말을 할 수 없게 됐다. 할아버지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스스로 혀를 깨물어 잘라버렸다. “사람(3ㆍ1운동 가담자)을 불어라, 대라”며 가해진 고문을 견디지 못해, 혹시라도 자신의 입에서 동료 이름이 나올까 봐 혀를 끊어냈다고 한다. 어머니는 출소한 할아버지의 대소변을 받아냈다. 몸이 극도로 상한 할아버지는 광복 후 몇 년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경기 화성시(당시 수원군) 송산면의 3ㆍ1운동 주동자 중 한 명이었던 왕광연(1872~1951) 지사의 손자, 왕의항(72)씨가 들려준 가족 이야기의 한 토막이다.

그 어느 곳보다 격렬하고 파괴적이었던 3ㆍ1운동의 고장 송산면은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19년 3월 당시 만세운동 참여자들이 일제와 맞서 싸우다 순사를 처단했던 곳이다. 그 대가로 무려 28명이 징역 6월~15년을 선고받았다. 일제의 고문과 보복 살인 등으로 순국한 사람은 최소 6명이었으며, 집들은 불탔다. 송산의 아픔은 주로 비폭력ㆍ평화운동으로 일컬어지는 3ㆍ1운동이 실제로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었음을 보여준다.

송산면 3.1운동 당시 순사를 처단했던 장소를 왕의항씨가 가르키고 있다. 이진희 기자
◇일본 순사를 죽였던 그 날

“당시에는 허허벌판이었대요. 여기 지금 송산파출소 앞 이 자리에서 일본 순사를 죽였고, 그 직전에 저기 삼거리에서 시위대하고 일본 순사하고 멱살잡이하면서 부딪혔고…. 처음에 시위대가 초가로 지은 학교 앞에 운집했다가 일본 순사 주재소 쪽으로 내려왔어요.” 지난달 13일 송산면 사강리에서 만난 왕의항씨는 100년 전의 현장을 마치 자신이 겪은 양 술술 설명했다. 할아버지들이 아버지들에게, 어머니들이 아들딸에게 전해온 그 날의 일들. 구전되고 교육되면서 현재도 이곳 주민들은 공동의 기억으로 3ㆍ1운동을 마음속에 지니고 있다. 왕씨가 설명하는 동안 주민 한 명이 지나갔다. 반갑게 그와 인사하던 왕씨는 “저분도 독립운동가 아드님이에요”라고 말했다.

당시 재판기록(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제5권)을 보면 사강리 만세운동 주동자들은 홍면옥(이명 홍면ㆍ1884~미상) 지사를 비롯한 대부분이 농민으로 나와 있고 목수, 대장장이, 이발사, 잡화상, 포목상 등 평범한 이웃들이었다. 홍면옥 지사의 동생이었던 홍준옥(1888~1945) 지사와 문상익(1893~1960) 지사 두 명은 면서기(면사무소 사무원)이었음에도 만세운동에 앞장섰다.

홍면옥 지사는 1919년 3월 26일 오후 5시 송산면 면사무소 근처에서 태극기를 내걸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군중을 동원했다(사강리 만세운동). 여기에 왕광연ㆍ홍준옥 지사 등이 주동이 돼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3월 28일 오후에 송산면 뒷산에서 1,000여명의 군중이 모여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벌였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2권). 사강리 시장의 장날이었다. 군중을 감당하기 힘들게 되자 시찰 나온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野口廣三)는 총을 꺼내 홍면옥을 쐈다. 총성이 울리고 홍 지사가 쓰러지자 20여 명은 소리를 지르고 돌을 던지며 노구치를 쫓아갔다.

1919년 당시 제작된 ‘송산면 노구치 순사부장 살해 현장도’. 일제의 수원경찰서 순사가 그려 범죄행위를 지칭하는 ‘살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화성시 제공(국사편찬위원회 자료).

재판기록에 따르면 총알이 어깨를 관통하자 홍면옥 지사는 “순사를 죽이자”고 외쳤으며 왕광연ㆍ홍준옥ㆍ문상익 지사도 “순사를 쳐죽이라”고 절규했다. 일제의 폭력에 우리 군중이 고개를 숙이지 않고 곧바로 반격에 나선 것이다. 왕 지사 등 군중은 노구치가 자전거를 타고 도망치자 뒤쫓아가 돌과 몽둥이로 살해했다(독립운동사자료집 제5권). 홍면옥 지사의 신문조서에는 “원래 조선은 독립국이었기 때문에 독립함을 좋아하며 또한 만세를 부르면 독립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고 기재돼 있고, 왕광연 지사는 공판정에서 “마음속으로 조선독립을 희망하고 있다”고 한 것으로 돼 있다.

특이하게도 왕광연 지사에 대한 검사의 신문조서 중 ‘3월 28일에 군중이 순사를 죽였는데 최춘보(1867~1936)도 돌로 넘어진 순사를 난타하고 있음을 보았다’는 내용이 기재돼 있다. 홍면옥 지사의 장인이었던 김명제(1863~1926) 지사도 검사 신문 조서에서 “사위 원수 갚음으로 순사를 죽일 생각이 나서 순사가 넘어진 후 주먹만 한 돌로 그의 얼굴 등을 갈겨 군중과 함께 순사를 죽였다”라며 “그때 돌 또는 몽둥이로 때린 자는 임팔룡(1888~1921) 외 수명으로서 순사를 죽이라고 지시하였음은 홍준옥 외 2명이었다”고 기재돼 있다. 즉 순사를 죽이라고 외친 사람, 순사 처단에 가담한 이웃들의 이름을 이들이 진술한 것으로 돼 있는 것이다. 고문을 당하면서 이름을 대지 않기 위해 혀를 잘랐다는 왕광연 지사의 사연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왕광연 지사의 손자 왕의항씨가 송산면 사강리 자택 앞에 서 있다. 허름한 집 앞에 독립유공자의 집이라는 작은 팻말과 태극기가 붙어 있다. 이진희 기자
◇섬뜩했던 일제의 보복, 쑥대밭이 돼 불타다

독립을 외친 군중에 총을 쏜 일본 순사 한 명을 죽인 대가는 너무나 컸다. 순사를 쫓아간 이들은 21명으로 알려졌는데, 다음날부터 일제경찰은 닥치는 대로 부락민을 끌어가 수원경찰서 유치장은 만원이 됐다(독립운동사 제2권). 최종 32명이 기소돼 28명이 대부분 중형을 선고(4명은 무죄) 받았다. 19세부터 60세까지 연령층도 폭넓었다. 주동자 홍면옥ㆍ홍준옥ㆍ문상익ㆍ왕광연 지사가 징역 12년을 확정(홍면옥은 1심에서 징역 15년)받았고, 김명제 지사가 징역 10년, 임팔룡ㆍ홍명선(1900~1974)ㆍ차경현(1882~1939)ㆍ김교창(1889~1959) 지사 등 13명은 징역 7년 형, 최춘보 지사 등 4명은 징역 6년을 선고 받았다. 이들은 상고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유관순 열사는 징역 3년이었고, 보통 3ㆍ1운동 참여자들이 징역 1년 안팎이었던 것을 보면 이들의 형량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다. 홍면옥ㆍ왕광연ㆍ문상익 지사 등은 1924년과 1927년 두 차례에 걸쳐 감형돼 징역 8년 10개월 가량의 형을 살았다. 일본 황태자의 결혼 기념, 일왕 다이쇼(大正)의 장례 등에 따른 감형 조치였다(조선총독부관보).

[저작권 한국일보]그래픽 신동준 기자

살아서 옥살이를 마친 것은 그나마 행운이라고 해야 할까. 홍효선 지사(1879~1919)는 3ㆍ1운동 당시 체포돼 조사를 받던 중 잔인한 고문으로 순국했다(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김명제 지사는 옥사했다. 서신면 전곡리에 살았던 홍대우 지사(1847~1919)는 일제의 보복으로 4월 16일 사망했다. 일경은 그의 집에 들이닥쳐 집을 불지르고 자택 인근에서 사격을 가했다. 이혜영 전 제암리 3ㆍ1운동순국기념관 선임연구원(화성시 독립기념사업팀 주무관)은 “일제경찰이 1차는 주모자 체포, 2차는 보복성 방화와 총격에 나섰다”라며 “송산ㆍ서신면 일대를 거의 불바다를 만들었고 민가 200여 채가 소실됐다”고 설명했다.

고문이 얼마나 가혹했는지는 피고인들의 상고 취지 기록에 남아 있다. 홍면옥 지사는 “수원경찰서에서 옳고 그름을 묻지 않고 무수히 때린 후 심문에 답하고, 수원 검사정에서도 몽둥이로 구타당하고 또 불을 얼굴에 대고 강제 심문을 받았다. 경찰서 심문할 때 맞아 죽은 자도 있다”고 항변했다. 김교창 지사는 “수비대 및 순사가 와서 주재소로 동행을 요구하여 붙잡힌 수백 명의 사람과 함께 곧바로 수원경찰서로 보내져 신문 받았는데 이때 죽은 사람도 보았다. 피고도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러 수원 자혜병원에서 10여 일 치료를 받았다.” 차경현 지사는 “수비대 및 순사가 갑자기 와서 집을 불태우고 또 마을에서 죄 없는 사람을 붙잡고 수원경찰서에서 악형을 견디지 못하고 2번이나 정신을 잃어서 어떻게 답했는지 모른다.” 문상익 지사는 “수일을 거쳐 경찰 관헌 및 수비대 등은 가옥을 불태우고 도망자를 총으로 쏘고, 이후 남은 사람들은 노인이나 병자를 막론하고 모두 체포하던 중에 본인도 불행히 이에 포함됐다. 수원경찰서에서 신문을 받을 때 여러 가지 형벌을 실행하고 또 물을 먹이는 등의 극한 고문을 하면서 ‘정확하게 대답하라’고 했는데, 실로 본인은 죄를 지은 사실이 전혀 없으므로 한결같이 부인했다. 그렇지만 타인 등을 곤봉으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때리고 또 불로 몸을 지지는 것과 같은 과격한 수단으로 무리한 답변을 말하게 함으로써 본인이 죄를 저질렀다고 하는 증거를 3,4명에게서 얻은 후, 다시 본인에게 여러 방법으로 형벌을 가하고 또 물을 먹이는 가운데 본인은 정신을 잃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리가 부러지고 또 3,4곳에 상처가 났다. 따라서 생명이 끊어질 상황에 이르러 완전히 꿈을 꾸는 듯한 상태에서 나는 달리 말할 사실이 전혀 없어서 순사의 생각대로 하라고만 진술한 것이다.” (화성시 독립운동자료총서-3ㆍ1운동 재판기록)

이 기록들을 보면 3ㆍ1운동 참여가 가져온 가혹한 대가 앞에서, 상당수가 만세시위 주도나 참여 등을 부인하는 상황에 놓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가족들의 고통 또한 무참했다. 홍면옥 지사의 손자인 홍현유(68)씨는 “만세운동 이후에 수원군에서 군인들이 와서 6개 부락 주동자 집들을 다 불태웠다”라며 “살기가 힘들었고 가족들까지 고통을 당해서 아버지가 18세에 일본으로 밀항을 하셨다가 해방 후에야 홋카이도(北海道)에서 다시 돌아오셨다고 한다”고 말했다. 왕의항씨도 “아버지(왕화식)께서 삼대독자셨는데 할아버지가 출소하신 후 마을 주민들이 ‘이 사람이 너 아버지다’라고 말해줘서 알았다고 하셨다”며 “집이 불타고 부모님은 산에다 농사를 지으시면서 우리 5남매를 키우셨다”고 전했다. 왕의항씨는 할아버지와 부모님이 살았던 사강리 현장에서 여전히 살고 있다. 노구치 순사를 죽였던 곳, 만세운동이 벌어졌던 주재소가 있던 곳 등이 모두 100~300m 안팎에 위치해 있다. 고난의 가족사를 상징하는 듯한 왕의항씨의 허름한 집 앞에는 ‘독립운동 유공자의 집’이라는 팻말과 태극기가 붙어 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제대로 자리를 잡은 태극기였다.

왕광연 지사의 손자 왕의항씨가 집에 걸려 있는 독립선언문을 보여주고 있다. 왕광연 지사와 서대문형무소에서 친분을 맺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이갑성 지사가 해방 후에 찾아와 직접 써준 것이다. 왕의항씨는 “우리집 가보”라고 했다. 이진희 기자
◇“제일 똑똑했던 사람” 서훈 못 받은 지도자 홍면옥

각종 기록은 송산면 3ㆍ1운동의 제일 공로자로 홍면옥 지사를 가리키고 있다. 왕의항씨는 “홍면옥 선생은 한학을 하시고 가르치기도 했고 제일 똑똑한 분이었다고 아버지에게 들었다”며 “홍면옥ㆍ홍효선 지사 두 분이 고종황제 장례식에 참석하고 와서 3ㆍ1운동을 이 고장에 알렸다”고 설명했다. 남양 홍씨 집성촌이 있었던 송산ㆍ서신 지역 일대에서 항렬이 높은 홍면옥 지사는 사회적 지위와 영향력이 상당했다.

하지만 홍면옥 지사는 서훈을 받지 못했다. 1949년쯤 월북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홍면옥 지사의 손자 홍현유씨는 “할아버지가 ‘나 강원도 누이 집에 약수물 먹으러 갔다 온다’고 하셨다는데, 아버지는 ‘안 돌아오실 분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오늘부로 제사를 지내겠다’고 말씀하셨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홍면옥 지사는 출소 후 대교서당을 열어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김구 선생의 한국독립당에 가입해 활동했다. 또 해방 후 1946년에는 수원군인민위원회대표자 대회의에서 주석단에 앉았다. 홍현유씨는 “김구 선생이 통일정부 수립을 추진하다 이승만 대통령과 거리를 두면서 저격 당한 이후 한국독립당에 몸담은 사람들이 많이 희생당했다는 사실을 듣고 (할아버지가) 월북하셨다고 만 알고 있다”라며 “작은 할아버지(홍준옥 지사)는 독립장을 받으셨는데 할아버지의 명예를 찾아드리지 못해 가족으로서 많이 섭섭하다”고 안타까워했다. 홍면옥 지사의 북한 내 활동은 알려진 것이 없다. 왕의항씨는 “옛날에는 똑똑한 분들은 사회주의 사상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홍면옥 지사도 그랬던 것 같다”고 말했다.

홍면옥 지사는 3ㆍ1운동 당시 어깨 총상이 심해 순사들이 일본인 의사를 부르려 하자 치료를 거부했고, 상처에는 구더기가 생기기 시작했다(화성시 독립운동 자료총서6-나의 독립운동가 아버지를 말하다). “마, 너희가 쏘고 어디다가 손을 대냐”는 게 홍 지사의 말이었다. 결국 경찰은 사강에 사는 조선인 한의사를 불러 치료받게 했다. ‘나의 독립운동가 아버지를 말한다’에서 구술자였던 홍면옥 지사의 아들 고(故) 홍진후씨는 “지금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보다 그리움이 사무친다”며 “어디에 묻히셨는지 죽기 전에 무덤이라도 한 번 찾아뵙고 자식 된 도리를 하는 게 간절한 소망”이라고 전했다. 2013년 구술 기록을 했던 이혜영 주무관에 따르면, 홍진후씨는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작고했다. 어쩌면 아버지가 살아있는 역사 속으로 뒤따라 갔다는 표현이 맞을까.

이진희 기자 riv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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