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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마이너리티] <21> 암 생존자들

※ 대부분의 사람은 적어도 한 두 가지 측면에서는 소수자입니다. 자신의 불편은 크게 느끼면서도 다른 사람의 소수자성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냉소적인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화요일 한국 사회에서 유독 힘들게 살아가는 소수자들의 모습을 들여다 봅니다.

경기 고양시에 위치한 국립암센터의 접수 창구가 7일 오전부터 진료를 받으려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 전혼잎 기자

누구나 이름만 들으면 아는 유명 의류회사의 부장으로 승승장구하던 이충호(59)씨. 그가 임원 진급을 목전에 두고‘평생 직장’이라 여기던 회사를 그만둬야 했던 이유는 갑작스러운 급성골수성백혈병(혈액 암) 진단 때문이었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2006년 10월 추석연휴 마지막 날, 열이 41도까지 올라 간신히 찾은 응급실에서 기절한 이씨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이미 수술대 위에서 항암제를 투여 받고 있었다.

그때부터 힘겨운 날들이 시작됐다. 항암제 부작용으로 끊임없는 구토와 설사에 시달려야 했고, 체중은 치료를 받을 때마다 10kg가까이 줄어들었다. 항암 치료를 받다가 숨이 잠깐 멈춰 죽음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일도 있었다. 당시만 해도 암과 희귀난치성질환자에 대한 정부 지원이 없던 시절이라 치료에 들어간 비용만 ‘한 장(1억원)’이 넘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휴직 6개월째에 접어들던 시점에 회사의 인사담당 임원이 자신을 두고 ‘우리가 언제까지 이 친구를 돌봐야 하느냐’고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이를 간접적인 권고사직으로 여긴 이씨는 두말 않고 바로 사표를 썼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회사를 그만둔 지 얼마 되지 않아 조혈모세포를 이식 받았고, 상태가 호전돼 건강을 되찾았다.

한국인 100명 중 3명은 암을 앓았지만, 암 진단을 받은 2명 중 1명 이상은 5년 이상 생존해 있다. 7일 보건복지부와 중앙암등록본부의 ‘2016년 국가암등록통계’에 따르면 암 유병자(2012~2016년) 가운데 5년 넘게 살아있는 환자 비중은 처음으로 절반(52.7%ㆍ91만6,880명)을 넘어섰다. 의료계에선 암 환자가 치료 후 5년 넘게 재발 없이 생존하면 사실상 완치 판정을 내린다. 암이 서서히 불치병의 영역에서 벗어나 ‘또 하나의 만성질환’으로 변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암 진단을 받은 후 살아가야하는 ‘암 생존자’들이 겪는 사회적 어려움은 다른 만성질환자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암이라는 낙인이 찍힌 생존자들에게 복직ㆍ구직 등 사회 복귀 문턱은 높기만 하다. 병원 밖을 나서 일상으로 돌아간 100만명에 가까운 암 생존자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연도별 암 환자 중 5년 초과 생존자 비율. 박구원 기자

암 투병에서 살아남은 이씨. 그는 올해로 암을 진단 받은 지 10여 년이 훌쩍 넘었지만, 이렇다 할 직업을 갖지 못하고 있다. 이씨는 “조혈모세포 이식 후 건강이 괜찮아졌으니 주변에 일자리 좀 알아봐달라고 했으나, 모두 멈칫거렸다”고 털어놨다. 그는 직업교육기관에서 훈련을 받고, 창업지원센터에서 교육도 받았으나 단절된 경력과 나이로 인해 새로운 직업을 갖기는 쉽지 않았다. 2011년부터 봉사를 겸해 한국백혈병환우회에서 운영하는 감염예방 전용 무균차량 ‘클린카’를 운전하며 100만원 안팎의 월급을 받았으나 지난해 11월에 관련 사업이 축소되면서 이마저도 그만두게 됐다. 이씨는 “지금은 정부로부터 구직급여를 받고 있다”고 전했다.

우리 사회에서 암은 곧 ‘실직’이다. 암 생존자들 사이에서는 암과의 싸움에서 목숨은 지켜낼 수 있어도, 회사는 못 지킨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수시로 병원에 가야 하고, 또 안정이 필요한 암 생존자들은 원치 않게 회사를 그만두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국립암센터의 2014년 국가암환자 의료비 지원 사업 만족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암 진단 후 직장을 잃은 비율은 84.1%로 10명 중에 8명에 달한다. 이은숙 국립암센터 원장은 “많은 암환자들이 장기간 치료를 받아야 하고, 항암제 독성이 강해 일을 병행하기 어려운 치료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일자리를 잃는다”고 설명했다.

공기업에 다니다가 5년 전 위암에 걸렸다는 김유정(44)씨는 “1년에 주어진 연차휴가도 다 쓰지 못하는 우리나라 조직문화에서 ‘아프다’는 이유로 회사를 비우는 암 생존자가 계속 일을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얘기”라고 잘라 말했다. 김씨는 “주변에서는 ‘그만두고 푹 쉬는 게 낫지 않겠냐’고 계속 눈치를 줬지만, 일에 대한 애정이 있던 터라 수술 후 얼마 되지 않아 복귀를 했다”며 “그랬는데도 후유증 탓에 스스로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위를 잘라낸 탓에 하루에 조금씩 9번의 식사를 해야 했는데, 직장생활과 병행하기는 불가능했다. 김씨는 “치료 중에는 얼른 나아야지, 하는 생각뿐이었는데 막상 살아남으니 쓸모 없는 존재가 된 것 같다”고 씁쓸해했다. 그나마 공기업이나 대기업은 사정이 낫지만 영세ㆍ중소기업에 다니던 근로자들은 더욱 어려운 처지에 내몰릴 수 밖에 없다. 정윤정 가은병원 함암통합치료센터 간호팀장은 “이른바 번듯한 직장들은 1년 이상의 병가를 보장하지만, 제대로 된 체계가 없는 소규모 회사의 경우 환자들에게 대놓고 사직을 강요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의료비 지출은 늘어났는데 가계소득은 줄어드는 ‘이중고’에 시달리는 암 생존자들이지만, 실직 후 재취업은 더욱 어렵다. 암 생존자를 위한 직업재활이나 직업훈련, 구직 정보 제공 등 이들을 위한 ‘맞춤형’ 직업복귀 대책이 전무한 상황에서 이들은 자력으로 일자리를 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회로 돌아가려는 암 생존자들을 향한 시선은 싸늘하다. 2017년 5월 국립암센터가 일반인 1,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암 생존자는 일반인보다 직업 능력이 낮을 것이다’(57.3%)라거나 ‘암 생존자와 함께 있으면 불편할 것 같다’(40.5%), ‘암 생존자와 같이 일하는 것은 피하고 싶다’(30.9%)는 부정적인 응답이 많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제 막 사회 생활을 시작한 청년들은 암 진단을 받더라도 쉬쉬하고 숨기는 사례가 적지 않다. 광고업계에서 일했던 신모(34)씨는 “2년 전 유방암 치료를 위해 회사를 그만두면서 가족 말고는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며 “같은 회사로의 복직은 고사하고 이 업계에 돌아오려면 암에 걸렸단 소문이 퍼지면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는 판단 때문”이라고 했다. 신씨는 “수술 후 처음에는 2~3주에 한번 병원에 갔지만 지금은 1년에 한번 정도 병원에 갈 뿐인데, 사람들은 아프기 때문에 정상 업무 수행을 못할 거라고 여긴다”며 “어디가 아프면 약을 먹고 낫는 것처럼 암 생존자들도 그러게 봐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지난해 경기 고양시 국립암센터에 있는 '암생존자통합지지센터'에서 영양사가 암 생존자를 위한 영양 상담을 진행하고 있다. 국립암센터 제공

이처럼 일터에서 받는 차별에 더해 사회적 편견은 이들을 더 절망에 빠뜨린다. 특히 ‘가족 중 암 생존자가 있는 사람과 결혼을 피하고 싶다’라는 인식은 63.2%에 달할 정도로 부정적이다. 흔히 암이 유전적 요인으로 인해 발생하기 때문에 ‘가족력’이 있으면 위험하다는 인식 탓이다. 때문에 암 생존자들은 인간 관계로 인한 정신적 고통에도 시달린다. 결혼ㆍ임신 등을 앞둔 여성 암 생존자들이 겪는 차별은 더욱 크다. 결혼한 지 5개월 된 윤모(27)씨는 갑상선 암으로 우측 갑상선 제거 수술을 받고 지금은 병원에 정기 검진조차 다니지 않을 정도로 멀쩡해졌지만, 시댁에서 그의 병력을 알고 결혼을 반대하고 나섰다. 윤씨는 “갑상선을 떼내면서 대신 호르몬을 조절하는 약을 먹고 있는데, 나중에 아이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치거나 같은 병에 걸릴 수 있는 거 아니냐고 하더라”면서 “갑상선 질환 관련 약은 임신이나 수유에 문제가 없는데 괜한 편견”이라고 했다.

암 생존자들이 치료 후 사실상 관리의 사각지대에 놓인다는 점도 이들을 더욱 힘들게 한다. 현행 암 의료체계가 치료 중심이다 보니, 수술 후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면 병원에서 통원치료를 받는 것 외에는 뾰족한 관리체계가 없다. 사회 복귀는 고사하고 암 치료 후 어떻게 건강관리를 하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조차 제대로 얻지 못한다. 한번 암을 겪은 사람에게 다른 암이 또 생길 위험은 보통 사람보다 최대 4배 이상 높은데도 환자들은 치료과정의 고통을 떠올리며 병원을 외면하기도 한다. 간암 2기 진단을 받고 수술과 항암 치료를 마쳤던 이병석(43)씨는 “의학적으로 완치 판정을 받고나니 병원이 지긋지긋해 나도 모르게 멀리하게 됐다”면서 “‘설마 아니겠지’라는 생각에 미루고 미루던 검사에서 작은 혹이 발견됐는데, 결국 재발이 됐다. 다시 암과의 싸움을 시작하려니 막막하다”고 했다. 김영애 국립암센터 암생존자지원과장은 “‘암 환자가 암 검진을 가장 멀리한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라며 “암 생존자들이 건강 관리와 함께 심리적ㆍ사회적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통합적 지지체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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