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베트남 단상

입력
2019.01.05 04:40
27면

베트남은 멀고도 가까운 나라다. 우리가 늘 스트레스 받는 가깝고도 먼 나라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런 베트남으로 기억 여행을 떠나자.

1975년 5월. 국민학교 5학년 때 월남이 패망했다. 유신정부는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 국민을 지켜 줄 나라는 지구상에 없다”며 총화 단결을 강조했다. 우리가 북괴와의 전쟁에서 지면 베트남 사람들처럼 보트피플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무서웠다.

1992년 4월. 십수 년이 흘러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주중에는 MH(맨땅에 헤딩) 방식, 혹은 ‘죽기 살기 방식’으로 공부했다. 주말 휴식이 유일한 안식이었다. 베트남은 까맣게 잊었다. 벚꽃이 휘날리던 날, 우에노(上野) 공원의 도쿄국립박물관 동양관에 갔다. 과거 일본이 베트남에서 가져온 분청사기백자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분청사기는 15세기 조선이 최고인줄 알고 있던 한국 청년의 자존심이 산산이 부서졌다. 조선 분청사기보다 2배 이상 컸고, 선의 단아함이나 유약의 선명함도 좋았다. 묘한 매력에 미소를 보냈다.

2005년 8월. 기자 시절, 매주 금요일 아침은 기분 좋게 문화부 가는 날이다. 신간 소개에서 탈락한 책 중에 마음에 드는 책을 가져오는 날이기 때문이다. 보응우옌잡 장군은 프랑스와 미국, 중국을 차례로 격파한 20세기 최고의 전략가였다. 적이 원하지 않는 장소와 시간, 방법으로 싸워 이긴 베트남의 영웅이다. 그로 인해 우상의 나라들이 쓰러져 버렸다.

2013년 10월. 처음 베트남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했다. 베트남 중부 농촌지역의 리더들로, 코이카의 초청으로 왔다. 새마을중앙회 분당연수원에서 강의와 선진지 견학을 하는 강행군 일정이었다. 3시간 동안 한국의 19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농촌 개발사를 강의했다. 첫 인상은 1970년대 한국의 시골 농부 같았다. 작고 까무잡잡한 피부에 눈이 초롱초롱 빛난다. 열심히 경청했고 모르는 부분은 통역을 통해 질문도 했다. 베트남 커피가 더 맛있겠지만 한국의 인스턴트 커피도 좋다며 칭찬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 무렵이었다. 경북 농촌에 현장 지도를 갔다. 베트남 이주 여성이 가장이 되어 깻잎 농사로 생계를 유지한다고 전한다. 고맙게도 거동이 불편한 시어머니와 장애인 남편을 부양한단다. 모성애가 강해 아이를 낳으면 끝까지 책임진다고 한다. 살 수 있다면 아이를 낳는다는 그들이 부럽다. 그 가정에도 아이가 생기고 동네 자랑거리가 됐다.

2018년 12월. 박항서 감독이 일을 저질렀다. 상주 상무 시절만 해도 한물간 사람이었다. 과거 베트남이 생존과 전쟁에서 살아남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다면 현재 베트남은 축제와 축구를 즐길 줄 아는 청년 국가로 변해간다. 한국과 비슷한 충효, 모성애, 자존심, 국가, 국기는 두 나라 모두 숭상하며 소중하게 생각한다. 박 감독은 축구에 내셔널리즘을 이식시켰다. 베트남은 열광했고 한 번 이길 때마다 또 다른 베트남이 탄생했다. 지난 세기 울분과 광기의 역사는 사라졌다. 가난과 수탈의 기억을 훌훌 털고 축구를 통해 미래 비전을 패스하며 통합과 성장의 골을 넣었다.

현재 베트남은 좋은 이웃이라고 인식한다. 우리가 과거 베트남 전쟁에서 저지른 잔혹하고 아픈 기억과 상처를 그들은 모두 잊었다고 강조한다. 더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닌 공동의 미래를 토론하고 함께 가자고 제안한다. 혼란스럽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 배우고 익힌 톨레랑스에서 얻은 교훈인가. 아니면 제갈량도 고개를 흔든 칠종칠금(七縱七擒) 맹획의 나라 남만의 정체성인가.

우리가 과거 역사와 사건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싸우고 명분 논쟁을 하는 지금도 베트남은 미래 비전을 만드는 청년 국가로 성장한다. 우리가 2002년 가졌던 역동성, 화합과 신바람은 어디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는가.

유상오 한국귀농귀촌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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