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공예는 자신의 발자취를 감춘다

입력
2018.12.28 04:40
31면

나는 20세기 가장 큰 거짓말 중 하나로 “‘개인’이 최상의 가치”라는 말을 꼽는다. 그것은 구시대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과도기에 분명 필요했던 것이지만, 마치 최종 목적지가 ‘개인’인 것처럼 설득한 것은 그 의도를 의심케 한다.

‘개인’이 진리로 자리 잡은 20세기 후반의 사회가 과연 개인을 행복하게 해주었는지에 대해서는 극히 의심스럽다. 그 진리는 개인을 시장의 토대로 삼아 성장한 자본주의 속 일부에게만 이득이 됐으며, 대개의 개인은 상실과 고독이라는 슬픔을 배급받았을 뿐이다.

‘개인’의 우선순위에 대해 더 깊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일단 현대의 개인이 극심한 분열과 상실, 고독을 껴안고 살고 있다는 주장에는 큰 이견이 없을 듯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목수, 흔히 공예가라 불리는 가구를 만드는 목수다. 내가 십여 년 목수생활을 통해 얻은 처방은 ‘공예적 사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많은 논란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나는 공예의 반대말이 ‘예술, 미술’이라고 믿고 있다.

20세기 예술의 부흥은 개인에 대한 집중과 궤를 같이한다. 예술이 나를 표현하는 작업이라면, 공예는 나를 지우는 작업이다. 도식화의 우려를 감수하고 말한다면, 예술은 나를 긍정하기 위해 나를 부정한다. 지금의 나와 과거의 나를 부정함으로써 기존의 나와 다른 나를 구축하고, 그것을 표현한다. 나의 부정이 깊을수록 표현의 밀도가 깊다. 예술의 속성이다.

미학자 아도르노는 말한다. “미술은 자기 자신을 배반해야 하고, 자기 자신의 개념과 대립해야 하며, 불확실함이 자기 자신의 가장 내밀한 조직 속에 자리 잡도록 해야 한다. 미술은 그 핵심부터 모순적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기 존재와 갈등해야 한다.”

현대미술은 자기 부정의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표현함으로써 새로운 영역을 형성하기도 했다. 현실을 다르게 보게 하는 예술의 힘은 예술가의 자기부정을 통해 이루어지며 그래서 결국, “미술은 현실의 우위를 점한다.” 인정하지 않고, 부정할 수는 없다. 예술가의 부정은 스스로의 가치에 대한 인정에서 시작되며, 결국 자신에 대한 긍정으로 마무리된다. 멀고 고통스러운 자기부정의 끝에는 자기긍정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공예는 어떠한가? 공예는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다. 공예가는 자신을 인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 그저 스스로를 잊는다. 한 점의 물건을 만드는 과정 속에서 자신을 잊고, 완성된 물건에서 스스로를 지운다. 미술사학자 글랜 애덤스는 말한다. “눈밭의 사냥꾼처럼, 공예는 반드시 자신의 발자취를 감춘다.” 데리다가 파레르곤에 대해 말한 것을 차용하자면 공예가는 “모습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사라지고 자신을 감추고 지우기로 한 전통적인 결정에 따라 그것의 에너지가 최고조에 도달한 바로 그 순간 눈앞에서 자취를 감춘다.”

자기부정을 통해 도달하는 곳은 대개 오만이다. 망각 끝에 다다르는 길은 대개 공허다. 오만과 공허 중 어느 것이 세상을 더 나쁘게 하는지는 짐작할 수 없지만, 결국 자신을 공고히 할 긍정의 길이 충만함을 줄 거라는 기대는 갖기 힘들다.

공방 문을 열고 세상에 나서면 너무 많은 개인과 개성에 나는 쉬이 피로를 느낀다. 모든 사람이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세상이란 주머니를 뚫고 나오려 한다. 목수인 나는 버겁다. ‘나’라는 것이 잊으려 한다고 잊히고 지우려 한다고 지워지기야 할까마는 그 태도 속에 몸에 스며드는 어떤 것들이 있음을 느낀다.

한 해가 간다. 잊으려 해도 지우려 해도 잊히지 않고 지워지지 않은 나로 인해 분명 누군가는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얼마 안 남은 날들에 내가 해야 할 일은 아마도 미안하다, 내가 나를 지우지 못했다, 고 정중히 사과하는 일이리라. 미안하다, 진정으로.

김윤관 김윤관목가구공방 대표 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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