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방곡곡 노포기행] 50년간 지은 양복 10만벌… 가업 이어받은 아들 “100년 넘게 끌고 나갈 것”

입력
2018.12.29 04:4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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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부산 양복점 당코리 

 1969년에 일 시작한 이영재씨 25세에 최연소 재단 1급 자격증 

 인체 알고 싶어 ‘때밀이’ 해보기도 한창 땐 한 달 400벌씩 만들어 

 벨기에 대사로 발령받은 미국인 옷 맞추려 휴가 내며 찾아오기도 

 “30초만 보면 그 고객에 딱 맞는 옷을 어떻게 지어야할지 파악”’ 

 아들도 제대 후 ‘테일러’ 길로 “참신한 발상ㆍ감각은 나보다 낫다” 

26일 오후 부산 부산진구 당코리 테일러 봉제실에서 이영재(왼쪽부터) 대표와 이 대표의 아들인 이규진 이사가 옷을 짓고 있다. 부산=전혜원 기자
26일 오후 부산 부산진구 당코리 테일러 봉제실에서 이영재(왼쪽부터) 대표와 이 대표의 아들인 이규진 이사가 옷을 짓고 있다. 부산=전혜원 기자

‘남의 옷을 만들어주면서 정작 자신은 벗고 희생하는… 바늘처럼, 보잘 것 없는 조각들의 인연을 맺어 상생시키는… 실처럼, 지나친 욕심들을 끊어내 절제를 보여주는… 가위처럼, 올곧은 길을 정확하게 정도(正道)를 따라 인도해주는…자처럼, 불평불만 서러움을 깨끗하게 승화시켜 펴주는…다리미처럼, 양복을 만드는 소품 도구들도 인생의 삶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한평생 양복을 지어온 ‘양복장이’의 점포가 부산에 있다. 양복장이는 “첫만남에서 30초 안에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고, 그에게 정말 딱 맞는 옷을 어떻게 지어야 하는 지 안다”고 했다.

26일 오후 부산 부산진구 부전동 롯데호텔 옆문 맞은편 이면도로 10여m 안쪽. 유럽풍 양식의 짙은 초록색의 예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입구 위에는 황금빛 이니셜 ‘D.C.L’이 박혀 있었다. 부산의 토종 양복점 브랜드 ‘당코리’의 이니셜.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20대 아들과 함께 온 중년 여성이 “우리 아들이 여기서 양복을 해 입고 취직이 잘된 것 같다”면서 인사를 하고 나선다. 대답 대신 미소만 짓고 양복 가공실로 걸어 들어가는 노신사가 있었다. 그는 주문 받은 양복의 소매 부분에 대한 보정 작업을 하느라 분주했다.

50년째 맞춤 양복만 지어온 노포(老鋪) 주인 이영재(71)씨였다. “저는 멋을 파는 사람이에요. 손님마다 경제, 사회, 정치, 문화 등 각 방면에서 서로 다른 멋을 가지고 있어요. 그 멋을 다 이해해야 그 손님에게 딱 맞는 옷을 짓죠. 그러기 위해서 지금도 전문 서적을 보거나 신문 등을 보면서 다양한 분야에 대해 공부하죠.” 양복 가공실은 소박했다. 하얀색 커다란 테이블 위엔 흰색 종이가 깔려 있고 옷감과 가위와 연필 하나, 옷핀 꽂이만 있었다. 군더더기가 없었다. 한쪽 벽면에는 양복을 비출 수 있는 거울이 붙어 있고, 벽 한쪽 켠엔 노란색, 하얀색 줄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양복점이 너무 조용해 옷깃만 스쳐도 소리가 들릴 듯했다.

26일 오후 부산 부산진구 당코리 테일러에서 이영재(왼쪽부터) 대표와 이 대표의 아들인 이규진 이사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부산=전혜원 기자
26일 오후 부산 부산진구 당코리 테일러에서 이영재(왼쪽부터) 대표와 이 대표의 아들인 이규진 이사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부산=전혜원 기자

매장에는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각종 신사복을 비롯해 모닝코트, 이브닝코트, 턱시도가 전시돼 있었다. 각종 슈트와 코트, 재킷도 종류 별로 자기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진한 빨강에 깊이가 있는 푸른색 등 화려하고 품위 있어 보이는 색상의 넥타이들도 손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재봉실에는 새로 주문 받아 마름질이 끝난 양복의 옷감들이 멋진 양복으로 태어나기 위해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테일러’의 손길을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신은 인간의 두 손에 모두 54개의 뼈를 갖추도록 해 주셨지요. 그건 손을 이용해 항상 많은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저에게 그런 손이 있는 것은 고객에게 딱 맞고 결점이 없는 옷을 만들어주라는 신의 뜻으로 받아 들입니다.”

이씨가 양복 짓는 일을 시작한 것은 1969년 22세 무렵이었다. 고등학교도 마치지 못하고 경남 진해의 산사(山寺)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 결핵 때문이었다. 그때 친한 고향 친구로부터 양재학원을 다녀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재단사가 저한테 맞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내 병을 옮기지 않고 혼자서 할 수 있고, 손재주를 최대한 살릴 수 있으니까요. 게다가 산골 촌놈이 멋쟁이가 될 수 있는 직업이라 생각했지요.” 부산의 양재학원을 다닐 땐 ‘얼마나 더 살지 모른다’는 생각에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쉬지 않고 배웠다고 한다. 6개월 과정을 19일만에 끝냈다. 25세에 최연소 국가기능검정 재단 1급도 땄다. ‘뼈와 근육 등 인체 구조를 완전히 알아야 더 좋은 양복을 지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일부러 대중탕 목욕관리사(일명 때밀이)를 하기도 했다.

재단사 입문 7년 만이었다. 1977년 그는 부산 국제시장에 ‘당코리 테일러’ 브랜드를 단 자신의 양복점을 열었다. 그는 “미국에서 유명한 ‘당코’라는 양복 브랜드에 제 성인 ‘Lee’를 붙여 썼는데 한학자인 부친께서 집 당(堂)에 옛 고(古), 마을 리(里)를 붙여 써도 되겠다고 하신 점 등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한창 땐 한 달에 300~400벌씩 양복을 만들었어요. 맹장 수술 다음날 일하다가 수술 자리가 터지기도 했고요. 지금까지 지은 양복만 10만 벌이 넘을 거예요.” 현재 영업 중인 곳은 잠시 한 호텔 안에서 운영하다가 2016년 2월 새로 옮긴 곳이다.

당코리 테일러에서 이영재(왼쪽부터) 대표와 이 대표의 아들인 이규진 이사가 가봉을 하고 있다. 당코리 테일러 제공
당코리 테일러에서 이영재(왼쪽부터) 대표와 이 대표의 아들인 이규진 이사가 가봉을 하고 있다. 당코리 테일러 제공

오랜 세월 옷을 짓다 보니 오랜 인연을 쌓은 손님들도 많다고 했다. 1987년 부산미국문화원장으로 있을 때부터 이씨에게 옷을 지은 한 미국인은 벨기에 대사로 갔다가 일부러 휴가를 내서 이씨에게 옷을 맞추기 위해 방문하기도 했다. 지금도 이씨와 친분이 있다. 나이지리아 한 장관의 요청으로 옷을 맞추기 위해 이씨가 직접 영국으로 건너간 적도 있다. “손님들 프라이버시가 있어 일일이 소개하지 못하는 걸 이해해 달라”고 했다.

1984년 남성복 연구실도 운영했고, 1998년 부산국제영화제 초청 패션쇼를 비롯해 크고 작은 패션쇼를 50여 차례 열었다. ‘신사복 미학’ ‘옷은 사람이다’ 등의 책을 썼다. 10여 년을 자료를 모으고 준비해 만든 ‘신사복 미학’은 대학 교재로 사용되기도 했을 정도로 전문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이씨의 양복점 벽장에는 수천 벌의 옷감들이 깔끔하게 정리 정돈돼 있었다. 옷감 가격이 수백 만원에 이르는 것도 있었다. 3m 길이의 옷감이면 양복 한 벌을 만들 수 있다. 양복 한 벌을 만드는 데 대개 사흘 정도 걸리는데 이씨는 4~5일 이상 걸린다고 한다. “원단의 실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세심한 바느질하느라 다른 곳보다 하루 이틀이 더 걸린다”고 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 이씨는 쌓여 있는 옷감들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는 “양털로 만든 옷감들을 만지고 있으면 사람들의 옷을 위해 자신의 털을 내놓으며 희생한 양들이 생각나요. 양들에게 감사할 일이죠. 그러니 옷감 한 조각도 함부로 낭비할 수가 없죠. 옷감만 만져도 어떤 양인지 느낌이 오고, 어떤 옷을 만들어야 하는지 알 수 있지요.”

당코리 테일러에서 이영재 대표가 바느질을 하고 있는 모습. 당코리 테일러 제공
당코리 테일러에서 이영재 대표가 바느질을 하고 있는 모습. 당코리 테일러 제공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흐르는 세월을 재단하고 재봉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옷을 짓다가 잠이 들고 잠이 깨면 옷을 지어온 세월 속에 저도 늙고 병 들었죠. 수십 년 전부터 피를 토해 치료를 받다가 나중에 알고 보니 폐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돼 수술을 3번이나 했어요. 지금은 폐를 너무 많이 잘라 내 더 이상 일하기가 힘들어요.” 한 순간도 옷 짓는 일을 그만 두고 싶은 적이 없었던 그는 내년부터 일을 그만할까 한다고 했다.

가위와 바늘을 내려 놓을 수 있는 건 아들 덕분이다. 아들 이규진(27)씨가 자신과 아버지의 세월을 바늘과 실로 연결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들 이씨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양복점에서 양복의 멋을 깨닫기 시작했지요. 중학교 다닐 때부터 옷이 사람을 얼마나 아름답게 보여 주는 훌륭한 귀한 도구인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는 2010년 부산지역 한 대학에 입학했다가 2013년 제대 후 ‘테일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제대 후 1년 가까이 이탈리아 피렌체와 밀라노를 비롯해 영국 런던 세빌로 거리, 미국 뉴욕 5번가 등을 다니며 일을 하면서 최신 패션 정보를 모으고 트렌드를 파악했다. 2014년 경기도 평택 국제대학교에서 명품 양복제작반 1년 코스도 마쳤다.

매장 한쪽에는 자신이 만든 결혼 예복과 캐주얼 양복 등이 전시돼 있었다. 아들 이씨는 “이탈리아에 있을 때 오랜 역사를 이어온 패션 관련 가족 기업들이 많은 것을 보면서 가업을 이어야겠다는 소명 의식이 굳어졌다”고 했다. 그는 2015년부터 2년간 아버지 매장에서 재단, 봉제, 손님 응대, 매장 인테리어 등 양복점 운영에 대한 모든 것을 사사(?) 받았다. 지난해에는 젊은 층을 겨냥한 자신의 매장을 직접 운영해 보기도 했다. 대학 후배 취업 준비생들을 위해 ‘옷이 날개다, 내가 너에게 날개를 달아줄게!’라는 제목을 달고 무료 정장 대여 캠페인을 벌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금은 아버지와 함께 일하고 있다. 아버지 이씨는 아들 자신이 만든 옷을 직접 입고, 모델로 참여한 양복점 안내 책자를 슬며시 보여줬다. 키 180㎝이 훌쩍 넘는 훤칠한 외모의 아들은 전문 모델 못지 않은 풍채였다. 아버지는 “아들이 저보다 아직 옷을 잘 짓는 것 같지는 않지만 제가 생각하지 못하는 참신한 발상이나 젊은 감각은 확실히 뛰어난 것 같다”며 웃었다.

당코리 테일러에서 이규진 이사가 제단을 하고 있는 모습. 당코리 테일러 제공
당코리 테일러에서 이규진 이사가 제단을 하고 있는 모습. 당코리 테일러 제공

아들은 “전 세계에서 단 하나 밖에 없는 옷을 고객에게 만들어 드린다는 각오를 갖고 양복이 단순한 상품이 아닌 작품이라는 아버지의 철학을 마음 속에 되새긴다”며 “저도 훗날 양복점을 제 자녀들이 이어갈 수 있도록 해 100년 넘게 가업이 이어지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 부자는 내년 3월 초 함께 열 패션쇼를 준비하고 있다. 양복과 관련된 전문 책도 조만간 발간한다.

“태어나면서 배냇저고리를 입는 우리 인간은 성장하면서 그에 맞는 옷을 입지요. 긴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는 가족이 준비한 수의를 입는 것이 사람의 일생입니다. 옷으로 시작해 옷으로 끝을 맺는 것이 삶의 순리인 만큼 ‘옷은 사람이다’라는 생각은 더없이 자연스러운 것이라 하겠습니다.”

재봉실에서 다림질을 하는 아버지의 옆에 선 아들은 바느질을 시작했다. 아들의 오른쪽 가운데 손가락에 낀 금속 골무가 은빛으로 반짝였다.

[저작권 한국일보]부산-당코리. 강준구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부산-당코리. 강준구 기자

부산=권경훈 기자 werth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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