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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굴 아닌 ‘스펙 쌓기’ 된 영재교육 
 학원들도 선발 대비반 운영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니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우리나라에 영재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이다. 지난 두어 달 동안 아이가 혹시 그 많은 영재 중 한 명이 아닐까 기대를 품었다.

지난 10월 초 아이가 학교에서 받아온 안내장을 훑어보다 초등학생 대상 로봇 교육이 있다는 문구를 발견했다. 녀석이 로봇을 정말 좋아하는데 방과후학교엔 자리가 없고 다른 배울 곳을 찾지 못했기에 관심이 가 안내장을 정독했다. 아이가 로봇 교육에 참여하려면 교내ㆍ외의 복잡한 선발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로봇 교육을 한다는 곳은 바로 시도별 영재교육원이었다.

선발 첫 관문은 담임이다. 약 2, 3주 동안 담임교사가 아이의 학교생활을 관찰하며 영재성과 리더십, 창의성과 인성, 수학과 과학 학업 성취도 등을 파악했다. 다음 관문은 자기소개서 작성이다. 영재교육원을 지원한 아이들이 한날한시 한자리에 모여 스스로 자기소개서를 썼다. 교사의 관찰 결과와 아이의 자기소개서를 토대로 교사들로 구성된 학교추천위원회가 학교를 대표해 영재교육원에 지원할 대상을 선발했다. 이후 지원서와 자기소개서, 학교장 추천서 등의 서류를 학교를 통해 영재교육원으로 접수한 다음 마지막 관문인 심층 면접에 응시했다.

면접 장소는 지역 내 한 고등학교. 이른 아침부터 운동장이 영재교육원 응시 학생들을 태운 차들로 북적거렸다. 경쟁률을 추산해 보니 대략 6, 7대 1은 돼 보였다. 8시에 면접 대기장에 입실한 아이는 수험번호가 뒤쪽이었던 탓에 3시간 넘게 기다렸다. “시험이나 면접 문제와 관련된 내용이 혹시라도 나오면 다른 응시자들보다 유리할 수 있으니 대기 시간 동안 절대 책도 읽으면 안 된다”는 철통같은 지침에 따라 아이는 내내 연필과 지우개만 갖고 놀아야 했다.

오랜 기다림 뒤 응시한 필기시험은 단 1문제, 주어진 시간은 단 10분이다. 바로 이어진 면접은 더 짧다. 질문 하나당 응시자가 대답할 수 있는 시간은 단 30초. 질문은 서너 가지밖에 안 되니 총 면접 시간은 길어야 3분 정도다. 정오가 가까워질 때쯤 아이가 해맑게 웃으며 걸어 나왔다. 어땠냐는 엄마의 궁금증에 “뜬금없는 질문이 나와서 그냥 내 맘대로 얘기했어, 근데 너무 배 고파”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순간 ‘촉’이 왔다. 떨어지겠구나 싶었다.

한국교육개발원이 운영하는 영재교육종합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나라에서 영재로 ‘인정’받은 초등학생만 지난해 기준 5만6,277명이다. 중학생과 고등학생까지 합하면 10만9,266명에 달한다. 전국 초ㆍ중등 학생이 572만5,260명이니 2%에 가까운 아이들이 영재란 얘기다. 대부분은 수학, 과학 영재다. 온 세상이 컴퓨터가 주도하는 4차 산업혁명을 논하는 시대니 만큼, 영재 수만 보면 우리나라의 장래는 밝기 그지없다. 내년이면 우리나라가 법적 기반을 갖춰 영재교육을 시작한 지 꼭 20년이 된다. 그렇게나 많은 영재를 배출했는데 우리나라가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고 있다는 말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영재교육진흥법은 영재를 ‘재능이 뛰어난 사람으로서 타고난 잠재력을 계발하기 위하여 특별한 교육이 필요한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다. 참 모호하다. 현행 영재 선발 체계는 응시자를 처음 본 면접관들이 단 3분 안에 이 모호한 정의에 맞는 학생을 찾아내는 구조다. 물론 면접관을 만나기 전 교내 선발과 필기시험을 거친다. 그러나 수많은 학생과 학부모에 둘러싸여 있는 교사들이 과연 100%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영재 후보를 발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또 10분 만에 응시자들이 자신의 영재성을 종이 한 장에 표현해낼 수 있을까도 의문이다.

많은 과학자와 교육학자들이 우리나라 영재교육은 좋은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통과의례’로 전락했다고 우려한다. 영재교육원 수료가 이른바 ‘스펙 쌓기’로 변질했다는 것이다. “영재가 아닌 아이에게 영재라는 틀을 씌우고, 영재인 아이에게 그들과 같은 스펙을 쌓게 하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수학 과학 올림피아드에 여러 차례 참여한 한 이공계 대학교수는 “영재에 대한 명확한 기준도 없는 상태에서, 숨은 영재를 발굴하는 게 아니라 부모와 학교가 영재를 만들어가고 있는 셈”이라고 꼬집었다.

사설 학원들이 운영하는 ‘영재교육원 대비반’에 다녔으면 아이가 합격했을까. 설사 그렇게 ‘영재 타이틀’을 얻어냈다 해도 내 아이가 정말 영재인지는 확신하진 못했을 것 같다.

임소형 기자 precar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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