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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ㆍ1운동, 임정 100년-다시 부르는 삼월의 노래] <1>8호감방 울려퍼진 “대한이 살았다”
3.3㎡당 3.12명 누울 자리도 없어… 광복 전까지 9만여명 수감 추정
심훈 “그래도 눈빛만은 샛별과 같이 빛나”
서대문형무소(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지하의 고문실 중 일부. 이진희 기자

“날이 몹시도 더워서 풀 한 포기 없는 감옥 마당에 뙤약볕이 내리 쪼이고 주황빛 벽돌담은 화로 속처럼 달고 방 속에는 똥통이 끓습니다.”(소설가 심훈이 어머니께 보낸 옥중 편지 중)

고문과 굶주림, 하늘 한 점 바라볼 기회조차 박탈된 곳. 일제강점기 잔인함이 투영된 최신식 감옥 서대문형무소는 9만명이 넘는 독립운동가들에게 늘 생지옥으로 각인됐다.

1908년 10월 21일 ‘경성감옥’으로 문을 연 서대문형무소는 서대문감옥(1912년)으로 개칭한 뒤 1923년 5월 5일에서야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됐다. 개소 당시 조선총독부 시대 서대문형무소장 나카하시 마사요시(中橋政吉)가 작성한 기록에 따르면 감방 및 부속 건물 등 면적 1,586㎡(약 480평), 수용능력 500명(1908년)으로 전국 8개 감옥 중 가장 큰 현대식 감옥이었다. 이후 증축을 거듭하면서 1937년 기준 5만5,000㎡ 면적에 2,500명 수용 규모로 커졌다.

하지만 전국적인 독립운동과 의병 바람에 수용인원은 늘 만원이었다. 투옥 인원에 대한 정확한 데이터는 없다. 광복이 되던 시기 일제가 당시 만행을 은폐하기 위해 수형기록 대부분을 태워버린 탓이다. 박경목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장이 수형기록카드 6,259장(중복 고려 4,837명)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개소 시점부터 광복 전까지 9만4,000여명 가량이 수감된 것으로 추정된다. 박 관장은 “사형 또는 병사 등으로 사망한 200여명이 확인됐으나 이는 극히 일부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옥중에 사망했는지 추정이 어렵다”라고 말했다.

기록으로 추정되는 수형 생활은 처참했다. 1930년대 감방 3.3㎡(1평)당 수용밀도는 3.12명으로 대만(1.37명), 일본(1.19명)의 3배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좁은 공간에 더해지는 추위와 더위는 수감자들을 괴롭히는 일상이었고 배고픔 또한 이들을 고통스럽게 했다. 수감자들의 범죄 혐의와 노역의 정도에 따라 1~9등급을 매긴 뒤 밥그릇 아래 두께가 다른 밑판을 만들어 식사량을 조절했다. 당시 교도관의 증언에 따르면 특히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급식으로 소금이 얹어진 삶은 좁쌀밥만 나와 영양실조로 사망하는 이들이 속출했다. 광복 직전인 1945년 6~7월에는 360명가량이 굶주림으로 세상을 떠났다(양성숙 ‘서대문형무소의 개소와 항일의병의 투옥실태’ 논문). 여운형 선생은 회고록에서 “옥에서 주는 조밥을 먹다가 돌을 깨물어 이가 으스러졌다”라며 “감옥 안에서 누구나 앓는 치질에 걸려 고생했다”라고 했다. 손톱 밑 찌르기, 못 박힌 상자에 가두기 등 고문은 끔찍한 후유증을 낳았다. 좌익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고수복(1911~1933) 열사는 1932년 10월 체포 후 심한 고문으로 복막염을 앓았다. 이후 병보석으로 출옥했지만 열흘 만에 병사했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아들 이규창(1913~2005) 지사는 고문에 손가락이 휘어지고 부러졌다.

당시 열악한 상황은 독립지사들의 회고에도 고스란히 묻어난다.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서 “누울 자리가 없어 힘센 이들이 먼저 누운 자의 가슴을 밀어 자리를 만들어 모두가 누운 후에야 밀던 자까지 눕는다”라며 “힘써 밀 때는 사람의 뼈가 상하는 소리인지 우두둑 소리에 소름이 돋는다”라고 전했다. 3ㆍ1운동으로 수감됐던 소설가 심훈은 당시 옥중 어머니께 보낸 편지에서 “밤이면 가뜩이나 다리도 뻗어 보지 못하는데 빈대 벼룩이 다투어가며 진물을 살살 뜯습니다”라면서도 편지 말미에 “생지옥 속에 있으면서 하나도 괴로워하는 사람이 없고 눈은 샛별과 같이 빛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정준호 기자 junho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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