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보기] 너무 많은 것들

입력
2018.12.22 04:40
26면

인적이 드문 시골 산책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인사를 나누게 된다. 멀리서부터 서로의 실루엣을 바라보며 걸어왔으므로, 잠깐 스쳐가는 동안이라도 반가운 미소를 내비치는 것이다. 반면 들붐비는 도시에서는 그렇지 않다. 주말 저녁 명동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면 꽤나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에 낯선 사람의 인사에서 반가움이 사라졌다.

다른 사람을 만날 때 우리는 상황에 따라 다른 태도를 보인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동정심마저 달리 발휘된다. 사고를 당했거나 곤란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인적이 드문 곳에서 보면 누구라도 그를 도우려 할 것이다. 그러나 북적대는 서울 기차역 앞이라면 그렇지 않다. 예를 들면 남루하다 못해 인간의 존엄마저 잃어버린 듯한 사람을 보아도 우리의 동정심은 그를 모른 척 한다. 또는 푼돈을 내어주고 그 순간을 회피하려 한다. 빈곤한 노숙인이 너무 많이 보여서 동정심도 숨었다.

오늘날이 인류가 살아온 지난 날들과 비교해 명백하게 달라진 점 하나는 모든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림이나 사진과 같은 시각 이미지가 지금처럼 흔치 않았던 과거에는, 재현된 이미지 하나하나에 주술적 아우라가 깃들어 있었다. 200여 년 전만 해도 바다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산간 마을 사람은 그림을 보며 바다를 상상하곤 했다. 그러나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들이 매일마다 먹는 것, 입는 것을 다 찍어 올리는 오늘날 사람들은 좀체 미술관을 찾지 않는다. 볼거리가 인터넷 공간에 훨씬 많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이미지가 너무 많아 놀라움도 사라졌다. 지난 9월, 고용주의 폭언에 시달리던 여성노동자들이 면담을 요구하며 고용노동청을 방문했다. 어떤 사고가 일어났고 머리를 다친 여성노동자 한 명의 얼굴이 피에 덮였다. 현장에 있던 다른 사람이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이 실시간으로 페이스북에 올라왔다. 몇 시간 동안 사람들의 공분이 잇따랐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들이 찍어 올린 음식이나 여행 사진과 함께 금새 밀려 사라졌다.

인터넷 공간에서 금새 밀려 사라지기로는 말(言)도 그렇다. 읽을거리와 들을거리가 많지 않았던 과거에는 대화 한 마디, 글 한 줄이 가지는 무게가 지금보다는 훨씬 무거웠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불특정 다수에게 말할 수 있고 또 그러한 말이 넘쳐나는 지금은, 진지하고 중요한 말이 그저 그런 농담이나 목적이 불분명한 욕설과 뒤섞인다. 읽고 들어야 하는 말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모든 말이 의미를 잃는다. 우리는 5분 전에 지하철에서 본 너무 많은 사람을 벌써 기억에서 지워버린다. 너무 많은 말도 그렇다.

대개 너무 많이 말해야 할 정도로 중요해서 의미를 잃는 말들은 세상의 비참에서 비롯된다. 촛불의 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너무 많은 죽음이 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억울함을 호소한다. 세상의 너무 많은 비참은 너무 많은 말을 낳는다. 나는 말로써 세상을 나아지게 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또한 너무 많은 말은 가치를 잃는다고도 생각한다. 그리하여 나는 말하지 않고 침묵할 때가 많다. 꺼내어놓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은 말들을 뱃속에 눌러 담고는 고로롱거리며 참는다.

세상은 어쨌든 변한다. 200여 년 전 영국에서 굴뚝 청소부로 일하던 토마스 피트라는 이름의 여덟 살 하청노동자가 있었다. 어느 불운한 아침, 그는 아직 불씨가 남아있던 굴뚝을 맡았다. 그리고는 팔다리 뼈까지 녹은 육신을 떠나 끝까지 가난한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신 하나님 옆에 앉았다. 그의 죽음으로부터 4년 후, 아동 굴뚝청소부에 관한 위원회가 진상조사를 실시했다. 57년이 지난 후에는 아동노동이 금지되었다. 매년 굴뚝에서 발생하던 너무 많은 죽음이 멈추자 그 죽음들에 관한 너무 많은 말도 멈추었다.

손이상 문화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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