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밖 과학] 급격히 몸집 커진 육계, 인간소비가 종의 형태 바꿔

입력
2018.12.22 10:0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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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집사육되는 병아리들. 게티이미지뱅크
밀집사육되는 병아리들. 게티이미지뱅크

불과 수십 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 짧은 시간 동안 인류는 지구가 45억년 동안 경험한 것 이상으로 생물권(지구의 생물과 환경)을 급격히 바꿔 놨다. 1995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네덜란드 화학자 파울 크뤼천은 “인류가 새로운 지질시대를 열었다”며 현재 시대를 ‘인류세(人類世ㆍAnthropecene)’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류가 지구 역사의 중심이 됐다’는 선언이다.

그간 인류세를 구분할 지질학적 지표로 플라스틱과 콘크리트 같은 ‘기술화석’이 꼽혔다. 영국 레스터대ㆍ노팅엄대, 남아프리카공화국 노스웨스트대가 참여한 국제공동연구진은 여기에 “20세기 후반 이후 신체나 개체 수 변화가 극적으로 일어난 길든 닭(육계ㆍGallus gallus domesticus)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논문은 지난 12일 국제학술지 ‘영국왕립오픈사이언스’에 발표됐다.

고기를 얻기 위한 육계는 전 세계에서 227억 마리가 사육되고 있다. 조류 가운데 단일 종으로는 가장 많은 숫자다.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붉은머리참새가 전 세계적으로 15억 마리다. 오리(11억 마리) 집 참새(5억 마리) 칠면조(3억 마리) 공작비둘기(1억5,000만 마리)와 비교하면 육계의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다. 연구진은 “전 세계 육계의 몸무게를 합한 값은 나머지 다른 모든 조류의 무게를 합한 것보다 크다”며 “육계는 지구 역사상 단일 종으로 가장 숫자가 많은 조류”라고 설명했다.

조류의 뼈는 가벼워 화석으로 남기 힘들다. 하지만 육계의 뼈가 워낙 많이 나오는 데다, 매립장은 부식 역할을 하는 산소가 적어 후세에 닭 뼈가 화석으로 발견될 가능성이 크다. 2008년 한국에서 조류인플루엔자로 폐사한 닭 1,000만 마리를 묻는 등 대규모 매립 사례가 잦은 것도 이런 가능성을 키우는 부분이다.

육계의 평균 수명은 5~7주다. 육계의 알은 부화장에서 21일간 부화 과정을 거친다. 부화한 지 하루 된 병아리는 대규모 사육장으로 옮겨진다. 이곳에선 온도(32~35도)와 습도(60~70%)가 항상 유지된다. 그렇게 밀집 사육되다가 알에서 나온 지 5~7주 만에 도축된다. 육계의 조상인 야생 닭 ‘적색야계’(Gallus Gallus)의 수명은 3~11년이다.

적색야계는 지금으로부터 8,000년 전 육계로 가축화됐다. 고대 문명 발상지인 인더스강 상류 인더스 계속에선 기원전 2100~2500년 닭 뼈가 발견됐다. 유럽 남서부와 스페인 포르투갈을 포함한 이베리아 반도에는 1세기 때 확산됐고, 1500년대에는 스페인 식민지 개척자들이 신대륙에 육계를 들여왔다.

골격 화석을 비교한 결과 같은 나이대 육계(왼쪽)의 다리뼈 길이는 조상인 적색야계(오른쪽)보다 2배 더 긴 것으로 나타났다. 너비도 3배 더 컸다. 영국 레스터대 제공
골격 화석을 비교한 결과 같은 나이대 육계(왼쪽)의 다리뼈 길이는 조상인 적색야계(오른쪽)보다 2배 더 긴 것으로 나타났다. 너비도 3배 더 컸다. 영국 레스터대 제공

그러나 연구진은 “육계는 시기에 따라 크기가 급격히 달라졌다”며 “현재의 육계는 조상격인 적색야계는 물론, 불과 수십 년 전 육계보다도 몸집이 크다”고 말했다. 실제 같은 나이대의 육계와 적색야계 화석을 비교한 결과, 대퇴골과 경족근골, 부척골로 이뤄진 육계의 다리뼈 길이가 적색야계보다 2배 길었다. 너비도 3배 더 컸다. 연구진은 로마 시대부터 1340년까지 육계와 적색야계의 다리뼈 길이 등은 비슷했지만 이후 육계의 다리뼈 길이가 지속해서 증가 해 큰 차이가 나게 됐다고 설명했다. 1964년 이후 가운데 다리뼈인 경족근골의 유년기 성장률은 육계가 적색야계보다 3배 이상 크다. 또한 같은 육계여도 2000년 이후 품종의 몸무게가 1957년 때보다 4~5배 더 나가는 것으로 나왔다.

바뀐 환경에 적응한 개체가 종(種)의 변화를 이끄는 ‘자연선택’이 아니라, 인간의 소비가 해당 종의 형태를 바꾸는 ‘인간선택’이 일어났다는 얘기다. 인간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육계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조류가 됐지만 ‘영광’의 대가는 혹독하다. 가슴ㆍ다리 근육의 급격한 성장으로 심장과 폐가 상대적으로 작고, 뼈에 구멍이 많이 나는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해 오래 살기 어려운 동물이 됐다. 도축 연령을 부화 후 5주에서 9주로 늘렸더니 사망률이 7배 늘었다는 연구 결과가 있을 정도다. 전 세계 육계 병아리의 90%를 회사 3곳에서 공급하는 만큼 유전적 다양성도 훼손됐다. 연구진은 “육계는 자연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는 품종이 됐다”며 “육계는 인류가 필요에 의해 생물권을 변화시킨 생생한 사례인 만큼 인류세를 설명하는 지표로 쓰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변태섭기자 liberta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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