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모 칼럼] 모비 딕과 별 다방

입력
2018.12.1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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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안에 태풍이 몰아치든, 서울 한복판에서 군사쿠데타가 일어나든, 내가 대학입학에 실패하든 놓치지 않은 TV 프로가 하나 있었다. 지금은 폐지된 ‘명화극장’이 바로 그것. 한참 재수를 하던 1982년 한여름에 그레고리 펙이 주연을 맡은 ‘모비 딕(백경)’을 아주 인상 깊게 봤다.

그레고리 펙은 포경선 에이허브 선장 역할을 맡았다. 선장은 예전에 이미 흰 고래에게 한쪽 다리를 잃었다. 그리고 그 고래에게 ‘모비 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선장은 일등항해사 스타벅과 바다를 동경하는 가난한 청년 이스마엘을 비롯한 선원과 함께 크리스마스에 출항한다. 목표는 단 하나. 모비 딕을 잡아 복수하는 것. 하지만 모비딕과의 싸움에서 이스마엘만 살아남고 모두 다 장렬하게 죽고 만다.

그레고리 펙처럼 잘생긴 배우가 아무리 강렬한 연기를 펼쳐도 나는 에이허브 선장보다는 모비 딕 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 인어 아가씨와 함께 흰 돌고래가 나오는 만화영화 ‘마린보이’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미국 사람들은 고래에 미친 에이허브 선장에게 어떻게 감정이입할 수 있었을까?

영화의 원작소설 ‘모비 딕’이 출간된 시대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1820년 11월 20일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포경선 에식스호가 어떤 큰 고래와 충돌해서 침몰했다. ‘모비 딕’은 이 사건에 영감을 받은 허먼 멜빌이 1851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산업혁명이 없었다면 사람들은 모비 딕의 주인공인 에이허브에게 감정이입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냥 넘치는 복수심에 미친 사람이었을 것이다. 1760년부터 1820년 사이에 영국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제조 기술이 등장했다. 석탄을 사용하는 증기기관의 등장과 맞물리면서 이른바 제1차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산업혁명은 전 유럽과 대서양을 건너 미국까지 번져나갔다.

희한하다. 혁명이 일어나면 노동시간은 길어진다. 1만 2,000년 전 농업혁명이 일어났다. 한 번 사냥을 잘 하면 온 식구가 며칠이나 먹을 수 있던 구석기 시대 사냥꾼의 편한 삶에 비해 신석기 시대 농사꾼의 삶은 고됐다. 유골로 남은 발가락은 비틀어지고, 무릎은 관절염에 걸려 구부러지고, 허리는 굽었다. 19세기 산업혁명도 마찬가지였다. 산업혁명을 이룬 나라에서는 공장과 사무실을 밤늦게까지 가동했다. 기계를 시원하게 돌리기 위해서는 윤활유가 필요했다. 밤늦게까지 일하기 위해서는 환하게 불을 밝혀야 하는데 아직 전기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향고래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비 딕의 정체가 바로 향고래다. 서대문자연사박물관 로비 천장에 매달려 있는 바로 그 고래다. 향고래는 아래턱에만 이빨이 남아 있는 이빨고래다. 몸길이는 대략 20m, 수컷 몸무게는 35~70톤 정도다. 몸길이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뭉툭한 머리가 특징이다. 뭉툭한 머리는 기름으로 채워져 있다. 이 기름은 온도 변화에 민감하다. 깊이 들어가면 액체 상태였던 기름이 고체로 바뀐다. 무게는 변하지 않고 부피만 줄어드니 비중이 커진다. 머리를 아래로 향해 곧추세우면 수직으로 잠수할 수 있다. 3,000m까지 잠수해서 오징어나 대왕오징어를 잡아먹는다. 향고래는 300기압을 견디는 셈이다.

향고래 생태의 비밀은 바로 머리 기름에 있다. 사람이 관심을 가지는 것도 바로 그 기름이다. 산업혁명기에 향고래는 윤활유와 등유의 원천이었다. 오죽하면 향고래라는 원래 이름보다 굳이 기름을 강조한 향유고래라는 이름이 더 널리 알려졌겠는가. 영어로는 sperm whale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정도로 새하얀 기름이 가득하다. 이게 바로 에이허브 선장에게 감정이입하는 이유다. 산업 역군 에이허브 선장! 향고래가 없었다면 산업혁명은 한참 더 늦어졌을 것이다. 실제로 1846년만 해도 포경은 가장 빠르게 확장되는 산업이었다. 미국에서는 다섯 번째로 규모가 큰 산업이었다. 하지만 곧 산업이 기울기 시작했다. 고래 공급이 급격히 줄었기 때문이다.

향고래는 원래 동해에도 살았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도 두 마리가 새겨져 있을 정도다. 하지만 사라졌다. 2004년에는 70년 만에 동해안에서 발견되었지만 그 후 다시 나타난 적이 없다. 향고래만이 아니다. 귀신고래는 1977년 울산 앞바다에서 발견된 이후로 나타나지 않는다. 어디 갔냐고? 솔직히 말하자. 다 잡아먹었다. 우리의 불법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무슨 고래 기름이 필요하겠는가. 고래 고기만 먹지 않으면 된다.

모비 딕은 거의 잊혀진 소설이고 영화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모비 딕의 영향권 아래에 살고 있다. 전 세계 64개 나라에서 2만 3,000개 이상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는 커피전문점 스타벅스를 매일 보고 있지 않은가. 스타벅스는 별(star) 벌레(bugs)라는 뜻이 아니라 소설 속의 일등항해사 스타벅(Starbuck)에서 따온 이름이다. 별 다방을 지날 때마다 향고래 모비 딕을 떠올려 보는 것은 어떨까?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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