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빛나지 않는 것들의 가치

입력
2018.12.17 04:40
31면

안시성의 장군 양만춘은 영웅이다. 압도적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성을 지켜냈기에 역사의 한편에 당당히 자리를 잡았다. 역사상 수성(守城)을 했던 장군들은 많았지만 그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역사 속 인물 중 대부분은 성을 지킨 사람들보다는 성을 정복한 장군들이다. 지금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개발은 공성(攻城)에 가깝고, 안전은 수성에 해당한다.

살얼음을 걷는 것 같다. 여리박빙(如履薄氷)이다. 겉으론 멀쩡하게 보이는 땅들이지만 밑에선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불안하다. 싱크홀 사고에 이어 지하 온수관들이 터져 나오면서 과연 온수관만일까 하는 걱정이 앞서는 것은 당연하다. 땅위에선 선로전환기 오류로 고속열차가 탈선했다. 모두 불과 한 달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다.

부랴부랴 안전조치를 강화하겠다고 하고, 철저한 안전관리를 다짐한다. 관련 법령들의 개정이 추진되기도 하지만 내실있는 집행이 이루어질 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그런데 여기까지가 끝이다. 이러한 방식은 수십 년째 반복되고 있다. 안전이 크게 제고되지 못하고 있는 배경에는 우리 사회 기저에 자리잡은 인식과 평가방식이 있다.

미국 트래블러스 보험사의 손실통제 부서 직원이었던 하인리히는 그간의 사고데이터를 분석해 상해사고 1건 뒤에는 10배나 되는 무상해사고가 있었음을 밝혀낸다. ‘하인리히의 법칙’이다. 경미한 사고가 빈발함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은 결과, 큰 사고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전예방적 대응에 대해서는 그다지 후한 평가를 내리지 않고 있다.

압축성장 과정에서 리더들은 끊임없이 가시적 성과를 보임으로써 자신의 권위와 정당성을 지켜왔다.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기관장, 특히 선거를 통해 선출된 사람들은 자신의 성과를 극대화해서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을 찾는다. 바로 빛나는 새로운 사업이다. 이러한 현상을 대표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들 중 하나가 예산편성 내역이다.

내년도 SOC사업 예산규모는 약 20조원이다. 쪽지까지 동원하여 확보한 SOC 예산은 대부분 지역구에 있는 도로ㆍ전철ㆍ철도 건설에 쓰인다. 기존에 건설된 SOC의 안전유지에 대한 예산은 매우 경미하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중앙정부뿐 아니라 지방자치단체에서도 나타난다. 새로운 주민시설 조성에 우선적으로 자금이 집행되지, 보이지 않는 곳의 위험에 대한 대응은 후순위로 밀린다. 이유는 표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적 인식과 업무성과에 대한 평가기준이 개선되지 않는 한, 안전에 대한 큰 기대는 접을 수밖에 없다.

어느 사회나 빛나는 일이 있고, 빛나지 않는 일이 있다. 세상의 모든 영웅 뒤에는 그를 뒷받침하기 위한 수많은 노력들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웅에게만 관심을 기울였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땀은 소홀히 했다. 학교 교육에서부터 직장의 인사 및 성과평가까지 모두 마찬가지다. 그 결과는 고스란히 우리의 안전문화에도 이어졌다.

오래전 청룡영화제 시상식에서 배우 황정민의 수상소감이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60여 명의 스태프들이 차려놓은 밥상에서 그저 맛있게 먹었을 뿐인데, 나만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죄송하다.”는 것이었다. 영화의 뒤에 숨겨진 수많은 노력들을 밝은 곳으로 꺼내어 그 가치를 알린 것이다.

우리의 안전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국회에서 누가 어떤 안전법제를 만드는지, 어느 장관이, 어떤 지방자치단체장이 인기 없는 안전에 관심을 기울이는지, 현장에서는 어떤 이들이 안전을 위해 묵묵히 일하는지, 알리고 그 가치를 드러내 주어야 한다. 성을 잘 지켜낸 장군 역시 훌륭한 영웅인 것처럼, 우리 사회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하는 이들의 노력 역시 소중한 것임을 알 때 비로소 우리는 안전할 수 있다. 그들의 헌신에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최승필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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