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진의 어린이처럼] 선물

입력
2018.12.07 04:40
29면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는 아랫집에 아기가 태어났다. 이름처럼 푸르게 넘실거릴 듯한 엄마에게서 태어난 작은 아기 이름은 정겹게도 ‘살구’란다. 눈발까지 내리는 날인데 나와 아버지는 산골 추위를 헤치고 나무하러 간다. 눈 내리는 솔숲에서 얼굴과 손발이 얼마나 시리고 추위에 온 몸이 뻣뻣하게 굳을까. 살구에게 선물하기 위해서다. 살구가 태어났으니 이제 ‘살구네 마당’이 되고, ‘살구네 식구’라 불리는, 살구네 집에 가져다주려고. 보일러도 없이 장작으로 불 피우는 살구네 집에 이보다 더 요긴하고 소중하고 정성 가득한 선물이 또 있을까. 이제 살구네 집은 ‘따듯’보다도 더 뜨겁고, ‘따뜻’보다도 더 은근하게, 오래도록 환히 ‘뜨뜻’해리지라.

행여 이상화, 낭만화 된 시골 풍경으로 여겨진다면 이 시를 내밀고 싶다. “외할아버지 오신다고/아버지는/내가 친구처럼 키우던 닭을 잡았다.//너무 화가 나고 슬퍼서/이불 속으로 들어가 한참 울었다.//그런데//얼마 뒤, 어머니가 닭을 푹 고아/상 위에 올려놓았는데,/나도 모르게 입에 침이 고이고/어느새 내 손에 닭고기가 들려 있다.//아버지가 나를 보고/씨-익 웃으신다.//나도 아버지를 보고/씨-익 웃었다.(‘닭 잡는 날’ 전문)

요즘 도시에서는 채식주의를 표방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이는 지극히 환경 파괴적이고 인간중심적인 현대 문명에 대한 최소한의 저항과 반성, 책임의식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반생명적인 공장제 축산업이 아니라 산골 마을에서 직접 닭 몇 마리를 키우며 특별한 날에 육식을 취하는 형태라면 그저 ‘씨-익’ 즐겁고 기쁘게 받아들일 일이다. 산밭에 콩을 심으며 “한 알은 벌레가 먹고/한 알은 새가 먹고/한 알은 우리가”(‘콩 세 알’ 부분) 먹자고 노래하는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시집은 그러한 삶의 터전과 철학을 ‘씨-익’ 웃으며 자연스레 받아들인 어린이의 목소리로 말한다. 어린이는 친구들의 집과 얼굴을 떠올리며 하늘의 별자리처럼 이어보고(‘서로 손잡고’) 천년 넘은 이팝나무를 보며 앞으로의 천년을 상상하는(‘오월’) 원대한 시공간을 살아간다. 자연이어서, 가능한 일이다.

김유진 어린이문학평론가ㆍ동시인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