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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가부도의 날’ 어디까지 사실인가
영화 '국가부도의 날'의 한 장면. CJ엔터테인먼트 제공

‘그 시대에 살지 않아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을 이렇게나마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이 지경으로 만든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 꼭 봐야 한다.’

1997년 외환위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국가부도의 날’ 관객들이 온라인에 남긴 감상평이다. 지난달 28일 개봉과 동시에 박스오피스 1위에 올라 일주일 만에 관객 144만4,700명(4일 기준)을 모은 이 화제작은 ‘각성’과 ‘분노’를 강조하는 후기를 대거 유발하고 있다. 관객의 공분은 극 중에서 당면한 경제위기를 감추는데 급급하다가 서민들이 받게 될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국제금융기구(IMF)에 자금 요청을 강행하는 경제 관료들을 겨냥하고 있다.

하지만 감사원 보고서(98년)와 국회 국정조사 보고서(99년) 등 외환위기의 책임 소재를 규명한 공식 문건이나 당시 재정경제원(현 기획재정부, 영화에선 재정국)과 한국은행 등 관계당국에서 일했던 이들의 증언 등에 비춰볼 때 영화가 묘사한 당국의 위기 대응 과정을 고스란히 실재했던 일로 받아들이는 것은 곤란하다. 특히 위기 해법을 두고 사사건건 부딪치며 선악(善惡)구도를 형성한 한은 팀장 한시현(김혜수 분)과 재정국 차관(조우진 분)의 언행은 사실보다는 상상력에 기반했다고 보는 게 낫다. 영화의 주요 내용이 얼마나 사실에 부합하는지 점검해 봤다.

◇한은 보고서가 위기대응의 출발?

영화에선 한은 총재가 그 해 11월5일 한시현이 작성한 금융위기 보고서를 청와대 경제수석에게 전달한 것을 계기로 정부 대책팀이 가동된다.

그러나 실제 정부가 위기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은 그해 5월 태국에서 촉발된 동남아시아 외환위기가 대만과 홍콩을 덮친 10월 하순이었다. 김인호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은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홍콩증시가 10% 넘게 폭락한 23일을 위기를 인지한 날로 지목했다. 연초 한보 부도로 시작해 7월 기아 도산 위기로 정점을 찍은 기업위기가 금융위기로 번지며 외국인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던 우리나라는 홍콩 다음 타깃이었다.

한은이 외환 사정의 심각성을 알리며 비상대책을 촉구하는 보고서를 제출한 때는 10월27일이었다. 외환당국이 자금 유출로 치솟는 환율을 방어하길 포기하면서 외환거래가 사흘간 중단된 초유의 사태(10월28일)가 벌어지기 하루 전이었다. 때늦은 경보였다.

◇한은이 IMF행을 반대했다?

재정국 차관이 IMF에 자금 지원을 요청하기로 방침을 정하자 한시현은 “경제주권을 빼앗기게 된다”며 강력 반대한다. 한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IMF 구제금융을 선택한 것처럼 비치지만 현실은 딴판이다. IMF행을 적극 주장한 쪽은 오히려 한은이다.

직위나 역할 면에서 한시현의 실제 모델에 가까운 정규영 당시 한은 국제부장은 청문회증언을 통해 11월7일 대책회의에서 한은은 IMF를 통한 자금 차입을 주장했고 이틀 뒤 회의에선 윤진식 조세금융비서관까지 한은에 동조했지만 강경식 부총리 겸 재경원 장관이 마지막까지 부정적이었다고 전했다. 강 부총리는 결국 13일에야 IMF행을 결심했고 이튿날 김영삼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

◇IMF 아닌 다른 대안은 묵살됐다?

IMF가 아닌 대안을 내놓으라는 재정국 차관의 냉소적 요구에 한시현은 국가 자산을 담보로 한 자산담보부채권(ABS) 발행과 일본과의 통화스와프를 제시하지만 묵살당한다. 그러나 두 방안은 정부가 대통령에게 구제금융 신청 재가를 받기에 앞서 실제 검토했던 사안이다. 다만 이를 두고 “실효성이나 실현가능성 없는 대책을 검토하느라 IMF 지원 요청이 지연되는 동안 보유 외환이 환율 방어를 위해 낭비됐다”(국정조사 보고서)는 질책이 따르기도 했다.

정부는 당시 우리나라의 최대 단기차입선이었던 일본의 자금 지원에 실낱 같은 희망을 걸었다. 11월11일엔 엄낙용 재경원 2차관보가, 28일엔 임창렬 부총리(19일 강경식 후임으로 임명)가 직접 일본에 건너가 자금 지원을 타진했지만 결국 빈손으로 돌아왔다. 일본은 그해 단기차입금 220억달러 중 130억달러를 회수하며 한국의 외환위기를 심화시켰다. 일본의 자금지원 거부 뒤에는 IMF를 통해 한국 금융시장을 고강도 개혁하려는 미국의 의중이 있었다는 게 정설이다.

이훈성 기자 hs0213@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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