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응답하라, 공중전화

입력
2018.12.05 04:40
31면

그날 서울에는 첫눈이 내렸다. 첫눈으로는 1981년 이래 최고라는 8.8㎝나 내려 대설주의보까지 발령됐다. 주말 아침 세상은 온통 하얗게 변했다. 그러나 어떤 지역에는 블랙 위크엔드였다.

첫눈이 왔으니 처녀 총각의 마음이 어찌 들뜨지 않으랴. 시인은 안다. 정호승은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했고(‘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이 가장 먼저 내리는 곳은/ 나를 첫사랑이라고 말하던 너의 입술 위”라고 노래했다(‘첫 눈이 가장 먼저 내리는 곳’).

그래서 첫눈 오는 날 전화는 ‘난리 블루스’가 난다. 통화량이 평소보다 두세 배 폭주한다. 그러나 11월 24일 토요일 서울 중서북 지역의 청춘남녀들은 밀어와 밀회를 나눌 수 없었다. 그들은 공중전화로 달려갔다.

그러나 한번 버림받은 녀석은 결코 고분고분하지도 호락호락하지도 않다. 공중전화 부스가 도대체 어디에 있지, 얼마를 넣어야 하는 거지, 지폐를 넣어도 되나, 교통카드와 신용카드도 가능하나, 요즘도 콜렉트콜이 있나, 콜렉트콜 번호가 뭐지, 모르는 번호가 뜨면 받지 않을 텐데…. 디지털의 역설을 마주친 날, 우리는 아날로그로의 세계로 소환된 진기한 경험을 했다. 그곳에는 개인통신과 인터넷과 카드와 인공지능은 없다.

그날 종일 내 눈에 꽂힌 건 갑자기 귀하신 몸이 된 공중전화였다. 모성 생존 본능이 발동한 아내는 당장 공중전화 카드를 사서 비상용으로 아이들에게 주겠다며 어디서 살 수 있냐고 물었다(KT플라자에서 판다. 2002년부터 3분 한 통화에 70원). 하지만 난 술에 취해 인적 없는 전화부스를 찾아 헤매다 수없이 동전을 투입하며 그대와 하염없이 통화하던 순간이 먼저 떠올랐다. 많은 사람들이 이날 공중전화 부스 안, 이삼십 년 전 자신의 모습을 추억했을 것이다. 군대 갔을 때 오렌지색 전화기 앞에 긴 줄을 서서 드디어 어머니와 짧은 첫 통화를 했을 때 어머니는 말을 잇지 못했지.

수많은 청춘의 사랑이 이뤄지고 부서지던 곳. 그녀의 동네에 가서 전화를 걸었지만 매정하게 전화를 끊는 그녀. 수화기에서 속절없이 이어지던 “뚜뚜뚜뚜…” 신호음을 기억하는가. 1989년 가수 김혜림의 1집 타이틀곡은 ‘디디디(DDD)’였다. 요새 애들은 뭔 약자인지 모를 거다(교환이 필요 없는 장거리 자동전화다). “찰칵” 투입구에 동전이 떨어지는 그 차가운, 가슴이 벌렁벌렁 뛰는 금속성 사운드로 노래는 시작한다. “마지막 동전 하나 손끝에서 떠나면/디디디 디디디 혼자서 너무나 외로워…”

그 시절 영화에서 가장 선연히 남은 공중전화 이미지는 ‘영웅본색2’(1987년, 왕자웨이 감독)의 엔딩 장면일 거다. 갱단의 총을 맞은 형사 장궈룽(張國榮)이 피를 흘리며 공중전화 부스에서 아내에게 전화를 건다. 딸의 출산 소식을 들으며 아기 이름을 지어주고 숨을 거두었다.

내 손에 휴대폰이 들려지면서 이제 그런 건 다 유작이 됐구나. 리바이벌 될 일도 없겠지. 그런데 기다림도, 그리움도, 외로움도 같이 사라졌다.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그대 오기를 목 놓아 기다릴 일도 없고, 그대가 네 시에 온다 해도 세 시부터 설렐 일이 없다. 그대가 어디쯤인지 어디서 무얼 먹고 다니는지 다 안다. 지구촌에 있는 한 우린 365일 24시간 연결돼 있으니 그리움과 기다림의 여백은 없다. 이별과 만남은 문자 하나면 된다. 대신 비밀이 생겼다. 휴대폰을 모두 식탁에 까놓는 순간 우리는 ‘완벽한 타인’이다.

초연결사회의 재앙을 겪으니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던 우리 동네 버스정류장 앞 낡은 공중전화, 오랜 세월 휑하니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는 이 아날로그 쇳덩어리가 정다워 보인다. 한번 걸어볼까. 아차, 그런데 아내 전화번호가 뭐더라.

한기봉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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