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 이상한 사과

입력
2018.12.03 18:00
수정
2018.12.03 21:01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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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퍼 마이크로닷은 부모 사기 의혹이 불거진 뒤 "사실 무근"이라며 법적 대응부터 운운해 역풍을 맞았다.
래퍼 마이크로닷은 부모 사기 의혹이 불거진 뒤 "사실 무근"이라며 법적 대응부터 운운해 역풍을 맞았다.

“친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아이돌그룹 마마무 멤버인 휘인이 최근 아버지 사기 의혹에 휘말린 뒤 언론에 보낸 입장문의 첫 줄은 이렇게 시작된다. 가수는 부모의 이혼 사실까지 공개했다. 피해자 측이 오죽 답답했으면 채무 당사자인 부모가 아닌 자식의 이름을 언급하며 온라인에 피해를 폭로했을까 싶다가도 이후 벌어진 일을 보면 마음이 무겁다.

휘인은 아픈 가족사를 낱낱이 고백한 뒤 대중에 진정성을 ‘검증’ 받고 면죄부를 받았다. 고해성사를 강요받고 죄를 사한 중세의 종교 재판이 떠오른다. 종교 재판에서 중요한 건 고백과 반성의 태도. 중세의 종교 재판과 닮은 일련의 연예계 부모 사기 의혹 진화를 위해선 그래서 진정한 사과 여부가 중요하다. 피해자를 상대로 법적 대응 먼저 운운했던 래퍼 마이크로닷 등이 ‘역풍’을 맞은 이유다.

연예계는 이성보다 감성이 지배하는 시장이다. 그래서 논란이 터졌을 때 연예인은 사과의 진정성을 강도 높게 요구받는다.

분야의 특성 탓도 있지만, 연예기획사가 부적절한 사과로 일을 키우기도 한다. JYP엔터테인먼트(JYP)는 2년 전 ‘트와이스 쯔위 사과 동영상’으로 비난을 샀다. 쯔위가 MBC 예능프로그램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 대만 국기를 흔들어 중국 내 비판이 고조되자 쯔위를 앞세워 사과한 게 과잉 대응이었다는 비판이었다. 쯔위가 모국의 국기를 흔든 게 잘못이었을까. 중국 시장 관리가 필요했다면 JYP만 유감 표명을 하면 될 일이었다. 쯔위가 방송사가 준비한 소품(국기)을 들어 논란이 일었는데 정작 MBC는 유감 표명도 하지 않았다. 기획사와 방송사가 너무 많은 책임을 쯔위에 떠안겨 상처를 준 꼴이었다.

시간이 흘러 2년 뒤. 말 많았던 JYP의 쯔위 사건 대처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빅히트엔터테인먼트(빅히트)의 ‘방탄소년단 멤버 지민의 티셔츠 논란’ 사과에도 문제는 있다. 빅히트는 지민이 원자폭탄 이미지가 프린트된 티셔츠를 입어 논란이 일자 “당사 아티스트가 원폭 이미지와 연계된 모습에 불편함을 느끼셨을 수 있었던 점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지난달 해명했다. 문제의 티셔츠는 지민이 개인 일정 때 스스로 입은 옷으로 알려졌다. 빅히트가 준비한 무대 의상도 아니고 지민이 실수로 잘못 입은 옷의 사과를 왜 기획사가 해야 할까.

빅히트의 사과엔 주어, 즉 사과의 주체여야 할 지민이 빠져 있다. 빅히트는 자사 공식 입장 외에 지민의 사과문을 따로 내지 않았다. 주어가 빠진 사과는 진정성을 온전히 담보하기 어렵다. JYP가 쯔위에 너무 큰 책임을 떠안겨 문제가 됐다면, 빅히트는 정반대다. 기획사가 지나치게 앞에 나섰고, 지민을 뒤에 숨겼다. 양상은 다르지만 JYP와 빅히트 모두 사과의 주체를 망각했다는 점은 비슷하다. 주어가 잘못된 사과는 잡음이 일 수밖에 없다.

소녀시대의 티파니는 욱일기 문양이 새겨진 이미지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사용했다가 비판을 받자 자필로 쓴 사과문을 공개했다. 티파니의 소속사인 SM엔터테인먼트는 회사의 입장문을 내지 않았다. ‘당신 스스로 말하라(Speak Yourself)’는 주체성을 앞세워 세계의 청년을 사로잡은 방탄소년이라면, 빅히트는 티셔츠 논란에 당사자의 목소리도 내보내야 했다.

먹고 살길은 막막하고 희망은 보이지 않는 ‘절벽 사회’다. 쉽게 돈을 버는 것 같아 보이는 연예인을 향한 청렴성에 대한 요구는 더 강해질 것이다. 부모 사기 의혹은 전조일지 모른다. 성차별 반대 등 인권 감수성이 높아진 데 따른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ㆍPC)의 이슈가 국내 연예계까지 스며들면서 물의에 대한 적절한 대처는 더욱 중요해졌다. 사과 기술을 가르치는 강의까지 생긴 10여 년 전 일본의 풍경이 떠오른 건 지나친 걱정인 걸까.

양승준 문화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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