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하고 억압하고 배제… 삶을 위협하는 잘못된 디자인

입력
2018.11.30 04:4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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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 깔리기 쉬운 서랍장… 여자에게 위험한 공용화장실 등 하나하나 짚어내 

미국 아이오와주립대 키닉 스타디움의 분홍색 화장실은 여성스러운 색을 사용했다. 원정팀의 남성적 저돌성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다. 반니출판사 제공
미국 아이오와주립대 키닉 스타디움의 분홍색 화장실은 여성스러운 색을 사용했다. 원정팀의 남성적 저돌성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다. 반니출판사 제공

2016년 6월 세계적인 가구회사 이케아가 만든 서랍장과 옷장에 깔려 어린이 6명이 목숨을 잃었다. 같은 해 5월 서울 서초구 강남역 인근의 유흥가 남녀 공용 화장실에서는 30대 남성이 화장실에 들어선 20대 여성을 향해 흉기를 휘둘러 살해했다.

전혀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별개의 사건이지만 비슷한 맥락이 있다. 잘못된 디자인이 야기한 우리의 비극이라는 점이다. 안정적으로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서랍장은 아이들이 기어오르면 금방 쓰러지는 취약한 디자인에 기반했다.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공용 화장실은 실은 여성에게 가장 위협적인 디자인이었다.

불안전하게 디자인된 가구는 아이들이 기어 오르거나 장난쳤을 때 치명적인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 반니출판사 제공
불안전하게 디자인된 가구는 아이들이 기어 오르거나 장난쳤을 때 치명적인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 반니출판사 제공

우리는 미처 느낄 새도 없이 이미 디자인된 사회에 살고 있다. 무심코 지나친 여러 디자인에는 사회적 약자를 차별하고, 억압하고, 배제하는 요소들이 은밀하게 깔려 있다. 이 디자인들은 우리의 일상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무의식을 지배한다. 사회 도처에 널린 위험한 디자인은 마치 두꺼운 천 밑에 깔린 압정 같다. 늘 밟고 있어 위험한 줄 모르지만 언제 압정이 천을 뚫고 나올지 모르는 불안감이 상존한다.

책은 이 숨겨진 압정을 하나하나 꺼내 보여준다. 아동용 장난감부터 일하는 곳, 도시 환경에까지 모든 영역에서의 디자인을 다룬다. 원제 ‘Defined by Design’처럼 ‘디자인에 의해 정의된’ 우리의 가엾은 삶을 해학적으로 묘사했다. 차별을 호소하는 대중의 인터뷰와 풍부한 사례와 통계가 탄탄하게 이를 뒷받침한다.

여성들을 늘씬하게 만들어주는 하이힐의 디자인은 발목 염좌와 골절을 야기하기 쉽다. 반니출판사 제공
여성들을 늘씬하게 만들어주는 하이힐의 디자인은 발목 염좌와 골절을 야기하기 쉽다. 반니출판사 제공

디자인은 사소하게는 매일 아침 고르는 옷에서 시작한다. 대중은 이미 디자인된 옷에 몸을 맞춘다. 옷이 나만의 개성을 드러내는 훌륭한 도구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옷은 디자이너와 패션산업이 가장 효율적으로 판매하기 위해 디자인된 상품에 불과하다. 사람마다 체형이 다른데도 일괄적으로 나눠진 사이즈에 따라 옷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옷뿐이랴. 넥타이, 하이힐, 코르셋, 헬멧 등 건강을 위협하고 삶을 옥죄는 위험한 디자인이 수두룩하다.

디자인은 삶도 재단한다. 인간의 편의를 돕기 위해 만들어진 다양한 제품들이 실은 우리의 삶을 규정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자동차다. 남성들이 주 구매자였던 시장에서 자동차 디자인은 철저하게 남성 중심적으로 만들어졌다. 높은 트렁크 문, 손이 닿지 않는 대시보드, 높은 뒷좌석 창문 등은 여성 운전자를 철저하게 배제한 디자인이다. 출근길을 지옥으로 만드는 대중교통 디자인도 사용자인 승객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 높게 달린 손잡이, 불편하게 좁은 좌석 등으로 디자인한 지하철과 버스에 대중은 몸을 우겨 넣고 출근할 수밖에 없다.


 좋아 보이는 것들의 배신 

 캐스린 H. 앤서니 지음ㆍ이재경 옮김 

 반니출판사 발행ㆍ452쪽ㆍ1만9,800원 

 

손잡이가 손에 닿기 어려운 곳에 달려 있는 지하철과 버스는 키가 작은 승객들을 소매치기 위험에 노출시킨다. 반니출판사 제공
손잡이가 손에 닿기 어려운 곳에 달려 있는 지하철과 버스는 키가 작은 승객들을 소매치기 위험에 노출시킨다. 반니출판사 제공

우리가 머무는 공간에도 위험한 디자인이 침투해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차별적인 공간으로 지목된 곳은 화장실이다. 역사적으로 공중 화장실은 남녀 차별, 계층 차별 등 사회적 차별을 거울처럼 반영했다. 화장실 디자인 문제에 관해 책은 상당 부분(60쪽 가량)을 할애했다. 1860년 이전만 해도 여성용 간이 화장실이 설치돼 있지 않아, 여성들은 남성 화장실을 사용하거나 밖에서는 볼일을 보지 못했다. 1964년 이전에는 흑인 전용 화장실이 따로 있었다. 1990년에야 비로소 장애인의 공중 화장실 접근을 막는 방해물이 제거 됐다. 그럼에도 여전히 화장실 디자인은 차별적이다. 화장실을 사용하는 시간이 여성이 훨씬 긴데도 화장실 칸의 수는 남성의 그것과 비슷하다. 화장실 내 기저귀 교환대는 여성 화장실에 압도적으로 많은 점도 불평등하다. 남녀 분리 화장실을 법적으로 의무화했더라면 강남역 살인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핸드 드라이어가 너무 높이 설치되어 있어서 아이들은 혼자서는 사용이 어렵다. 반니출판사 제공
핸드 드라이어가 너무 높이 설치되어 있어서 아이들은 혼자서는 사용이 어렵다. 반니출판사 제공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서울이 꽤나 좋은 디자인이 많은 도시로 꼽았다는 것이다. 저자는 포용적 디자인으로 서울 지하철역의 스크린도어를 꼽는다. 또 서울시청이 추진하는 ‘여성이 행복한 서울 만들기 프로젝트’를 통해 여성 친화적인 화장실, 주차장, 보행, 환경, 공원 등을 조성하는 데 대해서도 높게 평가했다. 지하철 투신 등 자살률이 10만명 당 25.8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높고(2016년 기준), 전국에서 서울이 인구 대비 성범죄율이 가장 높은 도시라는 점(2017년 기준)을 떠올리면 막상 서울에 사는 대부분은 공감하지 못할 수 있다.

서울 지하철역의 스크린도어는 자살이나 사고를 막는 안전장치로 디자인됐다. 반니출판사 제공
서울 지하철역의 스크린도어는 자살이나 사고를 막는 안전장치로 디자인됐다. 반니출판사 제공

삶에 녹아 있는 위험한 디자인에 대한 고발은 세세하고 촘촘하지만 저자가 대안인 포용적 디자인으로 꼽는 것들은 다소 맥이 빠진다. 이는 역설적으로 위험한 디자인을 개선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저자는 그래서 개개인이 달라질 것을 촉구한다. 비판하는 데 그치지 말고 정부와 기업이 건축 규정을 변경하도록 목소리를 높이고, 아이가 다니고 있는 학교의 화장실이 형편없이 관리되고 있다면 입법자에게 이를 알리고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라고 한다. 예컨대 저자처럼. 그는 2010년 미 의회 위원회 청문회에서 시민 대표로 참석해 공중 화장실 성 불평등 문제를 지적했다.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은 그를 “디자인의 젠더 문제를 타개해나가는 데 지도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고, 에릭 슈미트 전 구글 회장은 “수많은 독자에게 소수 젠더, 소수 인종, 소수 민족 집단과 환자 등 사회적 약자가 내는 목소리를 들려준다”고 했다.

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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