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 트럼프 지지로 돌아선 ‘동성 커플’

입력
2018.11.30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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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28일 서울 서대문구 KT아현지사 통신구 화재 현장을 방문해 관계자들의 설명을 듣고 있다. 이들 중 일부 의원은 “세월호가 이 정부를 세웠다고 하는데, 이번 화재는 제2의 세월호 사건 아니냐”, “이 정부는 세월호 사건을 얼마나 우려먹었나. 이 정권의 무능함을 고스란히 보여준 사건이다” 등의 언급을 내놓으며 ‘세월호 프레임’ 조성에 나서기도 했다. 연합뉴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28일 서울 서대문구 KT아현지사 통신구 화재 현장을 방문해 관계자들의 설명을 듣고 있다. 이들 중 일부 의원은 “세월호가 이 정부를 세웠다고 하는데, 이번 화재는 제2의 세월호 사건 아니냐”, “이 정부는 세월호 사건을 얼마나 우려먹었나. 이 정권의 무능함을 고스란히 보여준 사건이다” 등의 언급을 내놓으며 ‘세월호 프레임’ 조성에 나서기도 했다. 연합뉴스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스(NYT)가 지난 26일(현지시간) 소개한 한 동성 커플의 스토리는 꽤 흥미롭다. 주인공은 뉴욕에 사는 빌 화이트(51)와 브라이언 외르(39) 부부. 화이트는 뉴욕의 명소 중 하나인 ‘인트레피드 해양항공우주박물관’의 관장 출신으로, 지금은 컨설팅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외르는 상업보험 중개인(broker)이다. 말하자면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혐오하는 ‘맨해튼의 자유주의 엘리트’ 커플인 셈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열혈 트럼프 지지자다. 트럼프 행정부가 성소수자들에 호의적이지 않다는 점은 이들에게 문제가 안 된다. 올해 겨울 트럼프를 위해 500만달러 기금 모금 행사를 열고 있고, 본인들도 5만달러 이상을 냈다. 휴대폰 단축 다이얼로 트럼프의 장남(트럼프 주니어)과도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는다. 지역과 직업, 정체성 등을 감안하면 흔치 않은 경우다. 기사 제목도 그래서 ‘자유주의자 커플은 어떻게 뉴욕의 가장 열정적인, 트럼프 지지자 2인이 됐나’이다.

NYT가 이런 질문을 던진 배경엔 2년 전 그들의 ‘변신’이 있다. 원래 두 사람은 오랫동안 좌파 세력을 후원했다. 지난 대선 때에도 힐러리 클린턴 후보 캠프에 거액을 지원했고, 캠프 내 영향력도 있었던 확고한 ‘클린턴 지지자’였다. 그러나 대선 당일인 2016년 11월 8일 자정 무렵, 예상을 깨고 트럼프의 당선이 확실시되자 이들은 침울해진 클린턴 캠프를 떠나 곧장 트럼프 캠프의 대선승리 선언 현장을 찾았다. 화이트는 “불행의 일부가 되긴 싫었다. 대통령이 결정되면, 그를 지지해야 한다고 믿는다”고 했다.

장황하게 이 커플의 이야기를 늘어놓은 건 비슷한 유형의 캐릭터를 한국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어서다. 원칙도, 신념도, 신의도 없는 기회주의자들 말이다.(수많은 ‘철새 정치인’을 떠올려 보라) 그들은 ‘옳고 그름’의 가치 판단에 관심이 없다. 정체성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자유주의자 커플의 ‘변절’은 그러니까 ‘난 그냥 승자(권력)의 편이야. 그게 뭐 어때?’라는 선언이다. NYT 칼럼니스트 미셸 골드버그는 27일 칼럼에서 “화이트, 외르를 트럼프 편에 서도록 한 건 뻔뻔한 기회주의”라며 “그들의 스토리엔 부끄러움을 모르는, 적나라한 (권력에의) 갈망이 담겨 있다”고 쏘아붙였다. 기회주의란 한마디로 ‘염치(廉恥)’의 문제다.

때문에 기회주의자는 비(非)도덕적(immoral)이라기보단, 오히려 도덕 관념이 아예 없는 ‘초(超)도덕적인(amoral)’ 존재로 봐야 한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언제 어느 때든 스스로를 포장하고, 얼마든지 돌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생 부(富)와 권력만을 추구해 온, 걸핏하면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태도를 취하는 트럼프는 이를 극명히 보여준다. 지난 8월 말 별세한 ‘미국 보수의 어른’ 존 매케인 전 상원의원 장례식에서 딸 메건이 “아버지가 고통 속에 복무하는 동안 안락과 특권의 삶을 누린 이들의 기회주의”라며 트럼프를 겨냥한 건 그의 ‘염치 없음’을 지적한 것이다.

지난 24일 KT 아현지사 통신구 화재와 관련, 일부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제2의 세월호 사건 아니냐”면서 정부 책임을 추궁했다고 한다. 안전ㆍ비상대책 미비를 탓하는 것이야 지당하지만, 그렇다고 ‘인명피해 제로(0)’인 이번 사고를 304명이 희생된 세월호 참사에 빗대는 게 과연 적절한, 아니 온당한 일일까. 더구나 그들은 지난 정부에선 세월호 언급을 사실상 금기시하며 정부 책임 축소에만 골몰했고, 심지어 진상 조사에도 비협조로 일관하면서 ‘세월호 피로감’을 들먹였던 세력의 일원 아닌가. 결국 그들의 발언은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를 노린 ‘기회주의적 레토릭(rhetoric)’,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읽힌다. 기회주의가 득실대는 게 정치 세계의 어쩔 수 없는 본질적 속성이라 해도, 최소한의 염치와 도덕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나.

김정우 국제부 차장 woo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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