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대통령이 바라는 ‘삶의 질’

입력
2018.11.27 18:00
수정
2018.11.28 10:19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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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게네스는 고대 그리스의 노숙 철학자다. 정복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길거리 더러운 통 속에서 사는 현자를 찾아 뭐라도 해주고 싶은 생각에 소원을 물었다. 그러자 그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대왕께서 통 입구에서 햇볕을 가리고 계시니 한 걸음만 비켜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이 일화는 삶에서 행복과 만족을 느끼는 양상이 저마다 얼마나 다른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끝없이 확장과 지배를 추구한 알렉산드로스와 달리, 디오게네스는 가난하지만 자족적인 삶에서 행복을 찾았던 것이다.

□ 행복과 만족이 아무리 주관적인 문제라 해도, 사람들이 삶에서 행복과 만족을 느낄 보편적 조건이 없는 건 아니다. 무엇보다 굶주리면 결코 행복하기 어렵다. 그래서 대부분 현대 국가는 우선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데 힘을 쏟아 왔다. 1960년대 이래 ‘한강의 기적’을 일군 우리나라도 그랬다. 청계천 피복상가의 나이 어린 여공들에게 각성제 먹이고 밤새 일을 시키면서도 ‘수출 100억불, 1인당 국민소득 1,000불’을 달성해 부자나라가 되어 보자고 달리고 또 달렸다.

□ ‘88 서울 올림픽’을 개최하고 민주화를 거쳐, 1996년엔 선진국 클럽이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그 이래 우리나라는 GDP 세계 12위, 무역 규모 세계 6위의 경제대국으로 도약했다. 양적인 경제지표로는 적어도 선진국 문턱엔 이른 셈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국민 개인이 느끼는 행복감이 거시지표를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이 드러났다. 일례로 2016년 UN이 발표한 ‘세계행복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행복지수는 세계 157개국 중 58위에 머물렀다.

□ 마침내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쪽으로 정책 초점이 이동했다. ‘국민이 행복한 나라’를 내세운 소득주도 성장 역시 국민 삶의 질 향상을 겨냥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최근 인천 송도에서 열리는 제6차 OECD 세계 포럼을 맞아 “GDP나 성장률보다 삶의 질 지표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도 그런 맥락일 것이다. 문제는 국가 산업기반이 크게 흔들리고 있는 최근의 비상상황에도 여전히 성장보다 삶의 질을 강조하는 지도자의 얘길 들으니 새삼 불안하다는 것이다. 번영을 향한 전진을 미룬 채 삶의 질이 높아지길 기대한다니, 혹시 디오게네스식 행복을 염두에 두고 있는 건 아닐까.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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