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디지털 디톡스

입력
2018.11.25 19:0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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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 서울 충정로의 KT 아현빌딩 화재로 인한 통신장애로 인근 카페에서 결제가 되지 않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4일 서울 충정로의 KT 아현빌딩 화재로 인한 통신장애로 인근 카페에서 결제가 되지 않고 있다. 연합뉴스

“현금만 받습니다! 2~3일 걸린답니다!” 지난 토요일 밤 9시쯤 넘어서였으니 수백 번은 외쳤겠다 싶다. 서울 마포의 집 앞 편의점에 들어서자 황급히 외쳐대는 아르바이트생 목소리엔 짜증이 묻어 있다. 안내문을 써 붙여 놨어도 오가는 사람들마다 이리저리 물어본 모양이다. 뉴스는 대개 그냥 뉴스였을 뿐인데, KT 아현지사 화재뉴스는 직접 영향을 끼쳤다. TV, 전화, 인터넷 등이 일제히 끊겼다. 사람 안 상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위안하면서 덕분에 이번 주말은 스마트폰, 케이블TV, 유튜브 없는 ‘디지털 디톡스’를 해보겠거니 했다.

□ 번거로운 일의 연속이었다. 주말이면 동네축구 멤버 모으기에 여념 없던 아들 놈은 먹통이 된 전화기를 붙들고 망연자실하더니, 동네 대신 집안에서 하루 종일 공을 몰고 다녔다. 다른 집에선 아이 내보낼 때 공중전화 사용법을 일러줬는데, 정작 공중전화가 없어 연락이 안됐단다. 주말에 드라마, 예능을 몰아보던 아내와 처제는, 켜질 기미 없는 TV만 노려봤다. 주문도 결제도 안 되니 동네 중국집은 일찌감치 문 닫았고, 그나마 문 연 족발집은 매출 걱정이 한창이었다. 이 글을 써야 하는 나도 집에서 멀리 떨어진 카페를 찾아 나섰다.

□ ‘고양이 대학살’ ‘책과 혁명’ 등으로 유명한 로버트 단턴이 ‘책의 미래’(교보문고)를 낸 적이 있다. 최고의 책 전문가이니 디지털 시대 책의 운명에 대한 질문을 꽤 받았던 모양이다. 단턴은 1960~70년대 마이크로필름 열풍 얘길 들려줬다. 장서 규모를 감당치 못했던 도서관들이 책을 마이크로필름화한 뒤 실물 책은 버렸다. 30~40년 지나서 보니 실물 책은 그저 조금 더 낡았을 뿐인데 마이크로필름은 훼손, 도난, 분실이 극심했다. 편리하다고들 하지만, 그 편리만 좇으면 훼손, 도난, 분실 또한 편리해진다는 역설이다.

□ 올해 영화 화제작은 단연 ‘서치’와 ‘완벽한 타인’이다. ‘서치’는 부녀 관계 회복이라는 할리우드식 분홍빛을 칠했고 ‘완벽한 타인’은 정반대로 개인의 내밀한 속사정을 블랙유머로 풀어냈다지만, 두 영화 모두 디지털 기술이 인간의 무의식이 된 현실을 짚어내고 있다. 디지털 흔적을 잘 뒤져보면 이제 한 인간을 역추적해서 재구성해낼 수 있는 수준이 되어 버린 것이다. 디지털 흔적이 끊기면 존재 자체도 사라지는 걸까. KT 아현지사 사고를 보니 ‘디지털 디톡스’를 재미삼아 할 게 아니라 화생방처럼 훈련삼아 해야 하나 싶다.

조태성 문화부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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