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담] “죽음은 두려움 대상 아냐… 충분히 준비하면 아름다운 마무리”

입력
2018.11.23 04:40
수정
2018.11.23 13:05
28면

‘죽음학 전도사’ 정현채 전 서울대 의대 교수

‘죽음학 전도사’로 유명한 정현채(오른쪽) 전 서울대 교수가 20일 서울 종로구 구기동 자택에서 조재우 논설위원과 대담을 하고 있다. 그는 올해 1월 방광암 진단을 받고 세 차례 수술을 받았다. 그는 “죽음학 강의의 최대 수혜자가 나 자신”이라고 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죽음학 전도사’로 유명한 정현채(오른쪽) 전 서울대 교수가 20일 서울 종로구 구기동 자택에서 조재우 논설위원과 대담을 하고 있다. 그는 올해 1월 방광암 진단을 받고 세 차례 수술을 받았다. 그는 “죽음학 강의의 최대 수혜자가 나 자신”이라고 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2015년 개봉된 영화 ‘아델라인’은 삶과 죽음, 젊음과 늙음에 대해 명쾌한 시각을 보여준다. 자동차 사고로 숨이 멎었다가 다시 살아난 주인공 아델라인은 100여년 동안 29세로 살아간다. 신분증을 바꿔 이곳 저곳으로 피해 다니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죽고 늙어가는 딸을 지켜보는 고통을 겪는다. 늙지 않고 죽지 않는 것이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줄거리다.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없다. 아프지 않고 살 수도 없다. 지금까지 현대의학은 병을 고치고 환자를 살리는 것에 집중했다. 반면 편안히 생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에는 소홀했다. 말기 환자라도 의사가 어떻게든 살려내지 못하면 의료실패로 인식했고, 유족도 의사를 원망했다. 하지만 때가 되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의 순리다. 의학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단지 죽음을 충분히 준비한다면 고통을 줄이고 ‘아름다운 마무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죽음학’의 큰 주제다.

‘죽음학’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이 높다. 용어 자체가 꺼림칙해서 ‘웰다잉(well dying)’ 등의 용어를 쓰기도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한다. 용어에 익숙해져야 죽음 앞에 당당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정현채(63) 전 서울대 의대 소화기내과 교수는 ‘죽음학 전도사’라는 별칭을 얻었다. 10여년 간 죽음학을 강의했고 올해 말이면 500회를 넘긴다. 그의 저서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가’도 인기다. 그는 올해 1월 방광암 진단을 받았다. 세 차례 수술을 통해 방광을 떼어내고 소장으로 방광을 다시 만들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차분하고 해맑았다. 그는 죽음에 대한 준비도 끝냈고 장례는 해양장으로 할 생각이라고 한다.

-암 진단을 받은 이후 건강은 괜찮으신지.

“방광암 진단을 1월 초에 받았고 수술을 세 번 했다. 6월에 재발해 두 달간 항암치료 받고 8월 말에 방광을 들어내는 수술을 했다. 5주간 입원했다가 퇴원한 지 두 달째다. 소장을 잘라 방광처럼 만들어 이어 붙이는 큰 수술이었다. 퇴원 직후 화장실을 15분마다 가야 해 심란했는데 요새는 2시간마다 가면 된다.”

-‘죽음학 전도사’의 입장에서 암 진단 전과 진단 후 어떤 차이가 있었나.

“전도사라는 명칭은 남들이 붙여줬다. 죽음학 강의를 한 게 11년째다. 죽음학 강의를 하지 않았으면 상당히 방황했을 것 같다. 강의하고 준비해온 대로 받아들였다. 오히려 강의의 최대 수혜자가 나 자신일지도 모르겠다. 특별히 죽음학 전도사가 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15년 전 갑자기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지’에 대한 궁금증이 들었다. 생물학적 죽음을 넘어서는 부분에 대해서는 따로 배운 게 없었다. 내과 의사로 환자 사망선언도 하고 심폐소생술도 했지만, 내 문제라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죽음이 타자의 문제였으나, 나 자신의 문제가 되면서 천착을 하게 됐다.”

-죽음학이라는 용어가 부담스럽다.

“용어가 꺼림칙하다고 피할 게 아니라 노출을 해서 정면 대결하는 게 중요하다. 집안에 집먼지 진드기가 있으면 알레르기 비염이 나타난다. 피하지 말고 저농도부터 노출하면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다. 어렸을 때부터 죽음에 대해 노출을 시켜 회피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용어를 다양화하는 것도 좋다. 웰다잉(well dying)도 좋다. 웰고잉(well going)도 좋은 말이다. 고잉이라는 게 어디로 가는 목적지가 있는 거다. 현대인 대부분이 죽음이 소멸한다고 생각하면 목적지고 뭐고 없다. 죽으면 ‘돌아가셨다’는 말을 쓰지 않나.”

-요즘 죽음학에 대한 관심이 부쩍 많아졌다.

“8~9년 전 의사들 대상 강의 제목을 ‘죽음과 임종’으로 했더니 학회에서 연락이 왔다. 제목에 죽음이 들어가 칙칙하다고 해 ‘아름다운 마무리’로 바꿨다. 암 환자 커뮤니티(카페)가 있다. 며칠 내로 돌아가실 분들인데 ‘극복하실 거다, 나아지실 거다’는 댓글뿐이다.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잘 떠나고 잘 마무리를 할 수 있게 고맙다, 사랑한다, 용서해달라는 말을 해야 한다. 심폐소생술이나 인공호흡기, 혈액투석 등은 급성질환 환자들 살리는 데 목적이 있다. 말기 암환자들에게 하면 적용이 잘못되는 거다. 대부분의 의료진이 환자의 죽음을 무서워한다. 의료 실패, 패배로 보기 때문이다. 아직도 의사가 진단 잘하고 치료만 잘하면 그만이지 그밖에 뭐가 필요하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 문제다.”

-인간의 노화, 죽음을 통제할 수 있다고 보나.

“항노화, 안티에이징과 같은 용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늙는 게 당연한 일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노화가 시작되어 늙고 병들고 죽는다. 노화에 수긍해야 한다. 안 죽으면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전세계적으로 죽는 사람이 하루 30만 명이다. 사흘 동안 안 죽으면 100만명이 늘어난다. 몇 달 뒤면 식량난이 일어난다. 적당히 살다 수명이 다하면 깨끗하게 물러나 주는 게 후손에게 도움이 된다. 200살, 300살 살면 뭐가 좋겠는가.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환상은 굉장히 어리석은 거다. 미국 러시아 등에는 냉동 질소에 들어가 있는 몇 백 구의 시신이 있다. 자연을 거스르려는 노력이다. 정자나 난자 등 단세포 동물은 냉동했다 다시 살아나기도 하지만 몇 조개의 세포를 가진 인간처럼 복잡할 때는 쉽게 되지 않는다.”

-해양장을 준비한다고 했다.

“조카가 경기 고양시에 가족 납골묘를 만들었다. 화장한 유골 200~300개가 들어갈 수 있다. 부모님도 그렇게 했고 나도 별일 없으면 그쪽으로 가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내가 해양장을 알아봤다. 사망 시점에 바로 연락하면 바로 준비가 된다고 한다. 배를 타고 인천 부두에서 적당히 떨어진 곳에 가서 뿌리면 되니 흔적도 없다. 해양오염 걱정은 없다. 배 타고 가는 비용 수 십 만원만 든다. 죽음이 끝이라면 그걸 하지 않을 거다.”

-강의에서 사후세계와 영적인 부분에 대한 언급을 많이 하는데, 반론이나 오해가 많을 듯 하다.

“죽음에 천착하고 3,400권의 책과 논문 자료, 동영상 등을 보면서 죽음이 끝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가끔 강의가 끝날 때 사후세계를 믿는지에 대해 질문 받을 때가 있다. 나는 ‘믿진 않고 알고는 있다’고 말한다. 지구가 둥글다는 걸 믿느냐는 질문과 똑같다. 그걸 어떻게 믿나, 아는 거지. 칼 구스타프 융도 ‘신을 믿느냐’는 질문에 ‘알고 있을 뿐’이라고 얘기했다.”

-근사(近死)체험 이야기는 유물론이나 실증주의적인 과학에서 벗어난다.

“혼란을 거쳐 더 넓은 걸 알게 된다. 나는 과학 학술논문도 300편 가까이 썼고 심사도 한다. 하지만 근사체험은 다른 문제다. 미국 정신과 의사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박사는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어린아이의 임종을 자주 지켜봤다. 환자들이 보는 삶의 종말체험이나 근사체험을 목격하면서 내린 결론이 인간의 육체는 영혼 불멸의 자아를 둘러싼 껍질에 불과하기 때문에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얘기했다.”

-신학이나 종교 차원으로 넘어가면 과학이 위험해지는 것 아닌가.

“근사체험은 의학의 한 분야로 발전하고 있다. 유명 학술지에 논문이 실리기도 한다. 근사체험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그래도 안 죽은 거 아니냐, 다시 살아난 게 아니냐’고 얘기한다. 하지만 근사체험 때 나타나는 여러 현상들이 실제로 우리가 죽은 다음에 겪는 것과 거의 같다. 빛을 보고 자신의 살아온 삶을 회고하는 것 등이 근사체험 때만 나오는 게 아니고, 실제 우리가 수명을 다해 육신을 벗어날 때 하게 되는 거다.”

-죽는 것이 아니라고 사람들이 생각한다면 지금 생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의 도덕, 윤리가 성립하려면 사후생의 존재가 요청된다고 했다. 칸트도 아마 사후생이 있다고 얘기하고 싶었을 거다. 칸트와 비슷한 시대에 살던 신비주의자 스베덴보리는 영계를 여러 번 갔다 왔고 저술도 많이 남겼다. 칸트도 처음에는 그를 비판하다 나중에 그의 이론을 상당히 받아들였다.”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인류에게 도움이 된다는 얘기가 있다.

“파스칼의 도박 논증 아닌지 모르겠다. 신이 있다는 것에 도박을 걸지, 없다는 것에 걸 것인 지다. 신이 없는 쪽에 건 경우에는 엉망으로 살다 죽었는데 신이 있다면 완전히 망하는 거다. 신이 있는 걸로 도박을 걸고 열심히 도덕, 윤리대로 살다 죽으면 신이 없어도 크게 망하는 경우는 없다.”

-우리가 일회성 삶을 살고 없어지는 존재가 아니라는 얘기인가.

“우리는 육체가 다인 줄 알지만, 육체보다 더 큰 차원에 걸쳐있는 영적인 존재라는 게 중요하다. 우리는 인간 체험을 하는 영적인 존재라고 했다. 내가 영적인 존재면 이웃집 사람도 영적인 존재고, 음식점 종업원도 영적인 존재다. 그걸 안다면 갑질도 할 수 없다. 자식도 부속물이 아니다. 부모의 몸을 빌려 태어난 것뿐이지 독립된 영적인 존재다.”

인터뷰=조재우 논설위원 josus62@hankookilbo.com

정리=변한나(논설위원실)

◇정현채는

1955년생으로 서울대 의대를 졸업(의학박사)하고 서울대병원 소화기내과 교수로 재직 하다 최근 퇴임했다. 위염, 위궤양 등을 유발하는 헬리코박터 파일로리 연구의 권위자다. 대한소화기학회 이사장, 대한헬리코박터 및 상부위장관 연구학회회장 등을 역임했다. 죽음학 강의를 통해 ‘죽음학 전도사’라는 별명을 얻었고, 한국죽음학회 이사를 맡고 있다.

논담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