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석학칼럼] 새로운 ‘달러 독재’

입력
2018.11.26 04:40
수정
2018.12.05 10:56
29면

도널드 트럼프는 중동과의 ‘전쟁’을 원치 않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중동의 체제 변화를 도모하는 미국의 개입을 포기하려는 건 아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2003년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과 같은 목적에서 이란에 대해 강력한 제재를 원하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트럼프는 2015년 체결된 이란 핵협정(JCPOAㆍ포괄적공동행동계획)을 지난 5월 파기한 이래, 이란 정권에 대한 압력을 강화해왔다. 지난 4일부터는 이란의 핵심 석유산업에 대한 제재가 시행됐다. 트럼프 행정부는 나아가 이란을 글로벌 달러체제로부터 완전히 차단하기 위해 이란 교역국 등에 대한 ‘2차 제재’를 추진하고 있다.

미국은 각국 은행 간 지급결제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는 국제은행간통신협정(SWIFT)과 미국이 감독하는 글로벌 결제시스템에서 이란의 은행들을 배제하려 하고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이란을 개방 이전의 암흑기로 되돌려 놓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SWIFT가 미국의 기관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벨기에에 소재한 SWIFT는 27개 다른 유럽연합(EU) 회원국과 함께 이란 핵협정을 지지하고 있다.

미국은 2001년 오사마 빈 라덴의 ‘9ㆍ11 테러’ 자행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고 빈 라덴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와해시키기 위해 각종 금융 수단을 강구해왔다. 처음엔 극단주의 그룹 및 연계세력의 자산을 동결하는데 초점을 뒀다. 하지만 스튜어트 레비 당시 미 재무부 테러 및 재무정보 담당 차관은 새로운 방안을 강구했다. 그는 바레인을 여행할 때 한 스위스 은행이 이란과의 거래를 중단했다는 현지 신문 보도를 접했다. 그는 미국도 적대행위와 관련된 민간 부문을 세계경제로부터 고립시키는 방법을 써서 제어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 직후부터 미국은 세계 각국 은행들에게 이란과의 거래를 끊도록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미국 당국은 이란과 거래하는 은행은 미국 시장에서 퇴출될 것이라는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2차 제재라는 말은 바로 그 선언과 함께 생겨났다.

레비 전 차관이 가동한 2차 제재는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제 정신이 있는 사업가라면 누구라도 미국 대신 경제가 마비된 중동의 이슬람국가를 파트너로 택하진 않을 것이었다. BNP 파리바은행 등이 제재를 위반했을 때 부과된 벌금액은 글로벌 금융시장에 충격을 줄 정도로 막대했다. 미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비슷한 방식의 제재를 북한과 수단, 심지어 러시아로까지 확대 적용했다.

마이클 헤이든 전 CIA 국장은 2차 제재를 ‘21세기의 정밀유도병기’라고 했다. 왜냐하면 2차 제재는 대형 해머라기보다는 정교한 메스에 가깝고, 그런 방식을 전쟁을 대신하는 효율적인 선택으로 여기는 유럽인들에게 특히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 제한적 제재는 미국의 최우선 무기가 됐다. 오바마 행정부는 EU와 함께 이란에 대한 징벌적 수단을 보다 날카롭고 정교하게 다듬었다. 이란이 결국 핵협정에 합의하고 추가 핵개발을 자제키로 한 건 그 효과가 증명된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의 손에서 그 동안의 정교한 메스는 대형 해머로 바뀌었다. 유럽의 한 고위 정책 당국자는 “트럼프 행정부의 새 제재는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로 떨어지는 ‘클러스터 폭탄’과 같다”고 했다.

트럼프가 이란 핵협정을 파기한 이래, 유럽 지도자들은 핵 프로그램 재가동을 막기 위해 이란에 대한 시혜조치를 어느 정도라도 유지하는 방안을 모색해왔다. 하지만 미국은 유럽 기업과 심지어 SWIFT의 국장들을 위협함으로써 그런 모색을 어렵게 만들었다.

더욱 놀라운 건 미국의 위협이 유럽의 핵심 공직자들에게도 가해졌다는 사실이다. 유럽투자은행(EIB)에 이란 핵협정을 지지해달라는 유럽 지도자들의 요구는 EIB에 대한 미국의 위협에 따라 별 성과를 거두기 어려워 보인다.

뿐만 아니라, 미국이 유럽중앙은행을 포함한 중앙은행들에 은밀한 위협을 가했다는 소문도 있다. 일례로 독일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는 자국 민간 은행들이 미국의 2차 제재 대상이 되는 걸 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분데스방크가 테헤란과 재정거래 계좌를 열려고 했다. 하지만 갑작스레 별 설명도 없이 계획을 철회했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인들이 제재의 적정한 수준을 두고 새로운 논의를 벌이고 있는 건 당연하다. 나아가 미국 금융시스템이 트럼프의 국가안보정책과 점점 더 깊이 연계됨에 따라, 유럽 정책 당국자들은 ‘달러의 독재’에 대해 개탄하기 시작했다. 최근 하이코 마스 독일 외무장관은 유력 경제지 한델스블라트 기고문을 통해 독자적인 유럽 결제시스템 설립을 촉구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하이코 마스 장관의 사례는 미국과의 관계에 가장 충직한 EU 회원국조차 달러 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체제를 추구하는 쪽으로 기울 수 있음을 시사한다.

EU는 이미 트럼프의 보호무역 공격에 대항해 미국 업계를 겨냥한 보복을 경고하고 나섰다. 당장 금융 부문에서도 같은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 유럽 기관과 개인들에 대한 위협엔 상응한 보복 위협이 가해져야 한다. 불행하게도 그것만이 트럼프가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외교적 수사이기 때문이다.

마크 레너드 유럽외교관계협의회 집행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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