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설정

[장애아 엄마, 세상에 외치다] (5) 돌봄은 누구의 몫인가

[저작권 한국일보] 돌봄은 누구의 몫인가. 김경진기자

두 건의 사망 소식이 가슴을 무겁게 짓누른 한 주였다. 하나는 장애인 자식을 키우는 엄마의 자살 소식이고, 또 하나는 집에 혼자 있던 성인 장애인의 사고사 소식이다.

지난 15일 이혼한 남편이 암에 걸려 홀로 고등학생의 자폐성 장애인을 키우던 엄마는 삶의 벅참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아파트에서 투신을 했다. 전날인 14일 밤에는 30대의 성인 발달장애인이 약물 과다복용으로 숨졌다. 평소 고혈압과 당뇨약을 복용했었는데 집에 혼자 있게 된 찰나의 순간 모든 약봉지의 약을 뜯어 한 번에 먹어버린 것이다. 당시 아빠는 외출 중이었고 엄마는 교통사고로 입원해 있었다고 한다.

첫 번째 엄마의 일은 미래의 내 일이 될 수도 있고, 두 번째 성인 장애인의 일은 내 아들의 일이 될 수도 있다. 자식이 발달장애인인 슬픔, 가장 깊은 곳에 묻어놓았던 그 슬픔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와 꿈틀댄다.

다음 날인 16일, 또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다. 지난 10월 2일 ‘가족에 의한 장애인 활동보조 허용’ 법안을 더불어민주당 오제세 의원이 대표 발의한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이제 가족 중에 장애인이 있으면 그들의 돌봄은 온전히 가족의 몫이 되겠구나.”

팔순의 할머니가 된 내가 중년의 아저씨가 된 아들을 뒷바라지하며 힘겨워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나는 언제까지 아들을 돌봐야 하고 언제까지 살아야 할까. 설령 100살까지 산다고 해도 아들을 남겨두고 혼자만 눈 감을 수 있을까.

이 법안이 무슨 법안인지를 알아야 내 혼잣말도 이해가 될 터. 우리나라에는 장애인 활동지원 제도라는 게 있다. ‘신체적ㆍ정신적 장애 등의 사유로 혼자서 일상생활과 사회생활을 하기 어려운 중증장애인에게 활동지원급여를 제공함으로써 자립생활과 사회참여를 지원하고, 그 가족의 부담을 줄임으로써 장애인의 삶의 질 증진을 목적으로 한다’고 국민연금관리공단 홈페이지에 소개돼 있다. 한 마디로 중증장애인은 나라에서 지원하는 활동지원사를 통해 일상생활에 여러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좋은 제도다. 잘 운영되고 체계적으로 보완되면 말이다.

국민연금에서는 장애인 직접 면접을 통해 한 달에 몇 시간 정도 서비스를 받으면 좋겠는지 심사해서 ‘시간’을 배정해 준다. 시간을 할당받은 장애인 당사자는 지원사와 연결이 돼 배정받은 시간만큼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지원사 급여는 국민연금에서 지급하고 이용자는 (경제 수준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10분의 1 가량 금액을 직접 부담하면 된다.

아들도 만 7세가 넘어가자 이 제도를 사용할 수 있다는 안내문이 왔다. 작년 3월부터 지원사의 도움을 받기로 결심했다. 아들을 남의 손에 맡긴다는 건 불안한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내게는 이 제도를 활용해야 하는 이유가 명백하게 있었다.

나는 현재만 살 수는 없다. 먼 미래를 보면서 현재를 살아야 한다. 내 사후, 또는 내가 늙거나 큰 병에 걸려 더 이상 아들을 지금처럼 보살필 수 없을 때를 항상 염두에 두고 현재를 살아나간다. 엄마인 내가 옆에 없더라도 아들 인생이 크게 바뀌지 않는 삶, 이것을 끊임없이 되새김질하며 매일을 살아나간다.

아들과 세상의 연결고리는 언제나 바로 옆에 있는 엄마다. “잉~”하는 의성어 한 마디면 모든 것을 알아듣는 엄마가 척척 알아서 원하는 것을 해준다.

아들은 연습을 해야 했다. 의사소통에 애를 먹고, 상황에 대한 이해력이 떨어지는 중증 장애인이기에 더더욱 연습을 해야 했다. 엄마가 아닌 타인의 도움을 받아 세상을 익히는 법을 연습해야 했고, 그 작업은 빨리 시작될수록 좋았다.

무엇이든 엄마여야만 했던 아들이 활동보조 지원 서비스를 받으며 변해가는 게 느껴진다. 지금은 엄마가 없어도 지원사와 하교를 하고 치료실에 들렸다 집에 온다. 지원사와 함께 하는 일상에 익숙해지니 이젠 엄마 없이 아빠와 둘이서도 목욕탕에 가게 되었다.

엄마인 나도 숨 쉴 여유가 생겼다. 허리가 아프면 병원에 가서 물리치료도 받는다. 전엔 아들을 데리러 가는 시간에 쫓겨 아파도 병원 갈 시간조차 내기가 힘들었다. 이 모든 건 지원사라는 존재가 장애인인 아들의 일상을 일정 부분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발의된 법안은 이러한 지원사의 역할을 가족도 할 수 있게 허용한다는 내용이다. 현행에서는 배우자, 직계혈족, 형제자매, 직계혈족의 배우자, 배우자의 직계혈족, 배우자의 형제자매는 장애인의 지원사가 될 수 없다. 부정수급에 대한 우려, 가족에 의한 방치 등 장애인의 ‘자립’이라는 측면을 우려한 조치였다.

가족이 지원사를 할 수 있게 되면 어떨까. 아마 발달장애인을 자식으로 둔 많은 엄마들이 자식의 지원사가 될 것이다. 남한테 자식을 맡기는 건 불안한 일인데 내가 내 자식을 하루종일 돌보면 나라에서 일정한 금액의 돈을 준다니.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자식은 엄마 손에서만 자라게 될 것이다. 물론 안전할 것이다. 엄마에 의해, 가족에 의해 살뜰한 보살핌을 받는 발달장애인은 무엇보다 안전이 보장될 것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영원’을 담보할 수 없다는 게 맹점이다. 늙고 병든 엄마가 홀로 자식을 돌보기 힘든 처지가 되면, 아빠가 잠깐 외출을 하거나 엄마가 교통사고 나서 며칠 입원이라도 하게 되면, 그 때 가서 급하게 지원사와 연결을 하려 할 때 이미 성인이 된 발달장애인은 타인이 자신의 삶 안에 들어온 그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발의된 법안은 “나라에서 돈 줄 테니 장애인은 그 가족인 너희들이 평생 책임져라”는 일종의 책임 전가와 다를 바 없이 느껴진다. 특히 언제나 예산 부족에 시달리는 장애인 정책. 가족에게 돈 주는 일에 예산을 쓰게 되면 나라에서는 그만큼 장애인의 자립과 일상생활을 위한 여러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에 소홀해질 가능성이 있다. “자 봐라. 장애인 정책에 이미 이만큼이나 예산을 주지 않느냐. 더는 못 준다. 다른 곳에도 예산이 쓰여져야 한다”고 외치게 될 그들에게 어떤 요구를 더 할 수 있을까.

이런 우려를 엄마들이, 가족들이 모르는 게 아니다. 알면서도 계속해서 가족에 의한 활동 지원을 허용해달라는 요구가 일각에서 불거지는 건 그만큼 좋은 정책인 줄 알았던 이 정책에 구멍이 많기 때문이다. 지원사들은 경증의 장애인을 선호해서 중증의 장애인은 지원사를 구하기가 힘들고 이 같은 양상은 지방으로 갈수록 심해진다. 농촌 지역에서는 가족 말고는 아예 구할 수 있는 지원사가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게다가 심층적인 장애이해 교육이 아닌 일주일 강의만 들으면 수료증을 주기 때문에 전문성도 떨어지고 인권감수성은 아예 기대하기 힘든 경우도 있다.

아들을 맡았던 첫 번째 지원사도 그랬다. 내 앞에서는 아들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였지만 뒤에서는 달랐다. 한겨울 눈더미 위에 주저앉아 지원사에게 머리를 맞으며 울고 있는 아들을 지인이 발견하지 못했다면 나는 여전히 그에게 아들을 맡겼을 것이다.

정말 장애인 당사자와 그 가족을 위한 법안을 내고 싶으면 가족이 아닌 타인의 도움으로도 장애인이 불편함 없이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도록 촘촘한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법안을 내야 한다. 농촌의 장애인도 중증의 장애인도 얼마든지 요청만 하면 지원사와 연결될 수 있도록 방법을 찾고 지원하는 장치, 그런 법안들이 발의되어야 한다.

장애인 돌봄이 온전히 가족의 몫이 되어버리면 지난주 내 가슴을 짓눌렀던 그러한 일들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발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일들은 곧 내 일이 될 수도 있고, 내 아들의 일이 될 수도 있으며, 지금은 ‘장애’와 무관한 삶을 사는 모두의 일이 될 수도 있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장애’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고, 누구나 장애인의 가족이 될 수 있는, 우리 모두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류승연 작가 겸 칼럼니스트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