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잔혹동화’ 컬링

입력
2018.11.19 04:40
30면
컬링 전 여자 국가대표팀의 김경애(왼쪽부터) 김영미 김선영 김은정이 15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파크텔에서 최근 불거진 논란과 관련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컬링 전 여자 국가대표팀의 김경애(왼쪽부터) 김영미 김선영 김은정이 15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파크텔에서 최근 불거진 논란과 관련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최근 여자컬링 ‘팀 킴’의 잇단 폭로는 충격이었다. 지난 평창의 겨울무대에서 ‘영미~’ 열풍을 일으켰던 주인공들이 오랫동안 참고 눌러왔던 내부의 부조리를 끄집어냈다. 순백의 빙판에서 일군 아름다운 성공 스토리가 사실은 ‘잔혹동화’였다는 고백이었다.

팀 킴은 김경두 전 대한컬링경기연맹 부회장과 그의 딸 김민정 감독, 사위 장반석 믹스더블 감독이 자신들을 사적으로 이용하는 등 부당하게 처우했다고 분노했다. 욕설과 폭언에 시달렸고, 포상금 등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이해할 수 없는 포지션 변경을 강요당했고, 팬들의 선물과 편지는 항상 뜯긴 채로 받았다며 울먹였다. 미디어와의 인터뷰에서도 김 전 부회장과 김 감독에 대한 것만 언급하라는 강요가 있었다. 선수들은 이게 다 김 전 부회장과 그 가족들이 10년 여 지역 컬링을 독식했기 때문이라며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선 큰 용기가 필요했다고 밝혔다.

사실이라면 이만큼 잔인한 반전도 없다. 평창에서 써 내려간 아름다운 겨울동화가 다 거짓이었다는 것이다. 평창올림픽을 함께 치른 외국인 지도자 피터 갤런트 코치까지 김 전 부회장과 그의 가족에게서 여러 문제를 느꼈다며 자신은 팀 킴을 100% 지지한다고 거든 것을 보면 개연성이 높아 보인다. 그게 아니라면 선수들은 스승에 대한 무책임한 폭로에 책임을 져야 한다. 19일부터 문화체육관광부와 대한체육회, 경북도가 합동으로 벌일 특정감사에서 잔혹동화인지 막장드라마인지가 밝혀질 것이다.

팀 킴의 반전드라마는 기시감이 있다. 팀 킴의 겨울동화가 쓰여지던 평창올림픽 기간 쇼트트랙과 스피드스케이팅에선 오래 곪은 상처가 터졌다. 스피드스케이팅의 노선영이 특정 선수의 특혜를 지적하고 단체 종목인 팀 추월 훈련을 한 차례도 같이 한 적이 없다고 한 인터뷰와, 여자 쇼트트랙 간판인 심석희의 폭행 사태 등을 통해 빙속 파벌의 구조적 문제가 속속 드러났다. 파문의 중심엔 ‘빙상의 대부’라 불리는 전명규 전 대한빙상경기연맹 부회장이 있었다. ‘작전’이란 걸 도입하며 한국을 쇼트트랙 강국으로 키워낸 인물이다. 파벌을 구축하고 무리한 지도 방식에 우려가 없진 않았지만 메달이 급한 정부나 경기연맹은 그에게 거의 전권을 맡겼다. 하지만 그렇게 거둔 메달 뒤엔 공정치 못한 선발과 억압, 희생이 뒤따랐다.

김 전 부회장 가족은 딸과 사위 외에도 아내와 아들, 여동생, 남동생, 처남에 조카까지 컬링에서 한 자리씩을 차지하고 있다. 친한 친구들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난다. 컬링이 가내수공업도 아니고, 일가에 의해 지배돼온 것이다. 생소한 종목을 들여와 키우기 위해선 책임지고 앞장설 인물이 필요하다. 지원을 받기 어려우니 가족과 친구들에게 먼저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적정 궤도에 오르면 인적 구성에 변화를 주고 정상적인 시스템이 작동되도록 했어야 했다. 스포츠가 한 사람, 한 가족을 위한 사업은 아니지 않은가. 김 전 부회장이나 전 전 부회장은 그간의 모든 성과가 온전히 자기가 일군 것이니 맘대로 지배해도 된다고 여겼던 것은 아닐까.

그들만의 왕국이 공고해지기까진 언론 등 사회의 무책임한 동조도 한몫했다. 스토리에 목마른 세상은 그들의 노력과 성과를 과장했고, 우상화시키며 알아서 성벽을 높이 쌓아 올렸다. 무리한 승리엔 반드시 희생이 있었을 텐데 결과에만 매달리느라 그들을 살피려 하지 않았다. 팀 킴의 경우도 지도부의 지나친 가족주의와 통제가 있었음에도 의심하지 않았다. 메달과 감동 스토리에 마냥 들떠 선수들의 아픔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거두’ ‘대부’라 일컫는 스포츠 실세들이 휘둘러대던 무소불위의 힘은 ‘신화’에 정신을 홀려버린 방관자들에 의해 무럭무럭 키워진 것은 아닐는지.

이성원 스포츠부장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