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골든 아워

입력
2018.11.19 04:40
31면

아주대학교 외상외과 이국종 교수의 회고록이 세상에 나왔다. 두 권 합쳐 8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지만 출간 직후부터 베스트셀러 상위를 차지하고 있다. 책의 제목이자 중증 외상 환자를 살릴 수 있는 한계 시간인 '골든아워'가 현 시점의 주요 담론이 되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의 인생에 대해 많은 이들이 단편적으로 알고 있다. 굵직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언론에 보도되고 되풀이되던 몇 가지의 사건들. 말을 낳고 말로 항변하던 많은 논쟁들. 그는 넉넉한 분량으로 개인의 시점에서 모든 일을 회고해간다. 두 권의 서술은 시기순으로 나뉜다. 첫 권은 2002년부터 2013년이고, 다른 권은 2013년부터 2018년이다. 도합 16년이다. 한 사람이 인생의 정점 16년을 기록해 한 책에 털어 넣었으므로, 이 책은 그의 인생에서 두 번 다시 나올 수 없는 책이기도 하다.

그는 처음에는 간 재생 연구를 하던 외과 의사였다. 하지만 모교 병원에 어느 분과에도 자리가 없었다. 그는 마침 병원 내에 신설되는 분과였던 ‘외상 외과’를 지도교수의 권유로 선택한다. 당시 외상 환자 시스템은 황무지에 가까웠다. 미국과 영국에서 연수를 마친 그는 ‘골든 아워’ 내에 환자를 살려낼 수 있는 선진국형 시스템을 우리나라에 도입하고자 마음먹었다. 여기서부터 우리가 아는 모든 일이 시작되었다.

책은 피가 튀고 살이 깎인다. 그는 매일 중증 외상 환자를 받아내며, 생명을 살리기도 놓치기도 한다. 시종일관 그는 의사의 본분을 지키지만, 죽어가는 환자들에게 연민을 느낀다. 그러자 그는 환자를 위해 병원 안에서만 싸울 수가 없었다. 그의 환자들은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한, 일용직 노동자나 소외계층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시스템에 희생되고 있었다. 그는 이제 구조와 맞서 싸우기로 한다.

그것은 매우 지난하고도 험난한 길이었다. 이 책의 절반은 그가 생사의 기로와 싸우는 내용이지만, 나머지 절반은 경직된 한국 사회와 맞서 싸우는 내용이다. 그러며 그는 주요한 사건일수록 더욱 눈물이 날 정도로 내면까지 비춘다. 아덴만 작전, 세월호 사건, 북한군 병사 사건 등을 바탕으로 서술되는 이 사회의 구조는 대단히 견고하고도 절망적이다. 그는 회한에 찬 목소리로 그것을 바꾸려고 노력하고 또 끊임없이 좌절한다. 심지어 책은 희망적인 결론을 도출하지 못한다. 책은 그의 후배 교수에게 헌사되어 있고, 그의 역할은 후배가 조금 더 나은 환경에서 의술을 펼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며 글을 맺는다.

이 책에서 가장 놀라웠던 단 한 문장이 있었다. 나는 병원 일화를 다룬 내 책의 프롤로그에 이렇게 명시했다. “내가 목격한 사실이 있었고, 그 사실을 극적으로 구성하거나 가공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여기 있는 글들은 사실과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그 말대로 나는 실제 사실을 그대로 적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프롤로그에 이렇게 썼다. “책에 기록된 내용은 내가 기억하는 범위 내에서 모두 사실이다.”

정말 책엔 100여 명이 실명으로 등장한다. 또한 몇몇 사람들은 그 자리에 있었던 직책으로 언급되고, 그가 치료를 맡았던 수많은 환자들이 가명으로 나와 죽어간다. 이 원고는 작년쯤 완성되었다고 들었으나, 사실관계와 명예훼손 등의 문제가 있어 출간까지 일 년이 걸렸고, 지금도 그 문제는 진행형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가치는 크다. 현장에 있는 사람이 대의를 위해 현실을 그대로 적었다.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면 비난받지 않겠지만 아무것도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언급함으로써, 그의 신념과 외상 환자들의 생명은 우리에게 주요 담론이 되었다.

역시 진실과 진심은 힘이 세다. 하지만 그것만큼 가혹한 것이 없음을, 나는 느낀다.

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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