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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저작권 한국일보]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이 14일 여의도에서 김정곤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만나 북한 비핵화 협상의 장기 교착 국면에 대한 해법을 설명하고 있다. 정 전 장관은 “김정은이 서울 답방으로 비핵화의 진정성을 보여야 한다”면서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을 설득할 방안으로 미국의 리비아 방식 회귀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국제적 견제장치를 제안했다. 오대근기자 inliner@hankookilbo.com

역사적인 6ㆍ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이후 북핵 협상이 장기 교착 국면에 빠져 있다. 미국 중간선거 직후로 추진됐던 북미 고위급 회담이 불발된 가운데 미국 싱크탱크가 발표한 보고서로 미국과 한국에서 한 바탕 소동도 벌어졌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가짜뉴스’로 규정하면서 진화는 됐지만 중간선거로 하원을 장악한 민주당이 북미 협상의 새로운 변수로 떠올라 내년으로 미뤄진 2차 북미정상회담의 성사도 장담하기 어려운 지경이다.

북미는 핵신고와 제재완화를 놓고 극한 대치를 하고 있다. 북한은 미국의 상응 조치가 없으면 핵ㆍ경제 병진노선으로 복귀하겠다는 으름장도 서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조차작금의 교착 국면을 중재하기가 쉽지 않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잇따라 남북문제를 총괄해온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을 14일 만나 한반도 비핵화 협상을 진단하고 교착 국면의 돌파 방안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_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북한 미사일 보고서’가 파문을 일으켰다. 미국 민주당은 2차 북미 정상회담 중지까지 요구하고 있다. 중간선거 이후 미국 정치 판도의 변화 탓인가.

“11월8일 북미 고위급 회담 불발 이후 미국 싱크탱크와 정치권에서 북한을 악마화하는 과정이 본격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트럼프가 북한에 속고 착각에 빠져 비핵화 협상을 시작했지만 성공할 리 없다는 주장을 정당화기 위한 시도다.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이익을 관철시키려는 군산복합체의 이해관계가 배후로 작용한다고 본다. 민주당이나 공화당의 당파적 이해를 떠난 미국 정치의 메커니즘인데 기성의 주류세력과 각을 세우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

_CSIS보고서 파문이 북핵 협상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뜻인가.

“당장 트럼프 대통령이 가짜뉴스라고 규정하면서 정책에 미칠 영향을 차단했다. 보고서 내용을 보더라도 13개의 미사일기지를 언급하면서 ‘삭간몰’ 1곳만 구체적 사진을 공개하고, 그마저도 한미 정보 당국이 이미 파악하고 있는 기지일 정도로 형편없다. 트럼프 대통령의 언급은 미국 주류사회의 여론몰이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_북한이 8일 북미 고위급 회담의 연기를 요청한 뒤로 북미 채널이 여전히 잠겨 있다. 미국의 핵신고 주장과 북한의 제재완화 요구가 여전히 접점을 찾지 못한 것인가.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발표에 따르면 북한이 먼저 취소한 것인데, 그렇다고 북한의 책임만 따질 일이 아니다.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이 7일 오후 1시 베이징발 뉴욕행 비행기를 예약해 놨다가 밤 11시 반으로 연기하는 일련의 과정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김영철 입장에서도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라 첫 번째 비행기를 취소해 놓고 또다시 물밑으로 부지런히 타진을 했는데, 미국 측에서 끝까지 희망적인 메시지를 주지 않자 차라리 다음에 만나는 게 낫다고 판단해 최종 연기를 제안한 게 아닌가 싶다. 북한이 먼저 약속을 깼다기 보다는 10시간 가량의 말미를 주고 계속 협상을 벌였으나 미국이 끝내 상응조치를 보장하지 않아 일어난 일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교착 국면을 돌파할 방법은 전혀 없는 것일까. 정 전 장관은 이 대목에서 “북한이 핵신고 등 비핵화 행동에 먼저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핵 협상의 장기 교착에다 중간선거 변수까지 겹치면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연내 서울 답방이 불투명해졌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지만 정 전 장관은 “평양선언에서 합의한 연내 답방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되레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에 대한 의심만 커질 것”이라고 김정은의 결단을 촉구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의 연내 답방 기회에 미국의 리비아 방식 회귀에 제동을 거는 국제적 견제장치를 제안하면서 북한을 설득해야 한다는 게 정 전 장관의 조언이다.

_핵 신고와 제재 완화의 극한 대치를 돌파할 수 있는 해법은 무엇인가.

“결국 신뢰의 문제다. 경제발전이 다급한 북한 입장에서는 미국에 대한 신뢰의 기록이 있다면 북미수교 등 관계정상화를 기대하고 미국이 시키는 대로 선조치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1994년 제네바 합의로 3개월 내 북미수교에 합의했지만 미국 정치상황으로 물거품됐던 기억이 있다. 대외적으로는 리비아 케이스를 무시할 수 없다. 리비아는 미국의 경제지원과 권력승계에 대한 묵인 약속을 믿고 핵프로그램을 포기했다. 실제 양국 사이에 수교까지 진행됐으나 카다피는 내전 와중에 살해되고 말았다. 북한이 리비아 방식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이유다. ‘레짐 체인지’의 트라우마를 떨치지 못한 북한 앞에 리비아 방식을 추진했던 볼턴이 다시 등장하고 북미 고위급 회담 직전 트럼프 행정부에서 또다시 최대 압박으로 밀어붙이기만 하니까 뒤로 물러선 것이다.”

_미국이 양보하면 교착 상태가 풀리지 않겠는가.

“미국이 먼저 움직이지는 않을 거다. 트럼프 대통령도 중간선거 이후 ‘시간은 우리 편’이라면서 압박과 제재로 일관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군산복합체에 이미 포섭된 강경파 대외정책 실무자들의 ‘리비아 방식’ 주장에 경도되는 게 아닌가 걱정스럽다.”

_문재인 대통령의 중재 공간이 협소해진 상황인데,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하나.

“북한이 먼저 나와야 풀리는 방정식이다. 문 대통령으로서는 북한이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도록 설득하고, 미국이 리비아 방식으로 회귀하지 않도록 국제적 감시ㆍ견제 장치를 마련하는 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우리 정부가 주도적으로 이끌고 중국과 러시아까지 끌어들인다면 미국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북한도 언제까지 미국과 1대 1로만 풀려고 해서는 안 된다. ‘통미봉남’식의 북미 협상이 번번이 실패했던 과거에서 배운 게 있다면 북한은 북미 1대 1 협상의 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북미수교까지 가려면 어차피 평화협정으로 가야 하고, 평화협정에는 당사자인 중국의 참여가 필수다. 결국 동북아안보협력체 개념의 다자안보시스템을 구축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평화협정을 논의하면 미국도 리비아 방식으로 가지 못할 것이다.”

정 전 장관은 1990년대 초반 통일연구원 부원장 재직 시절, 비밀리에 진행된 북미 협상 이야기를 꺼내며 북미관계 정상화의 지난함을 설명했다. 당시 김일성 주석의 밀명을 받은 김용순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가 미국 측 파트너를 만나 “주한미군의 한국 주둔을 인정할 테니 북미수교를 하자”고 제안했지만 미국이 단박에 거절했다는 것이다. 아버지 부시 행정부는 ‘북한은 압박과 제재를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고, 당시 판단의 근거였던 북한 붕괴론은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 정책으로까지 이어졌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그러면서 “지금도 군산복합체를 배후에 둔 미국 주류세력은 북한 붕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레짐 체인지를 밀어붙이지만 그야말로 희망사항(wishful thinking)에 불과하다”고 평가한 뒤 주류세력과 대결하고 있는 ‘이방인’ 트럼프에 대한 기대감을 표시했다.

_북미 기싸움 와중에 북한은 핵ㆍ경제 병진노선 복귀까지 위협하고 있다. 협상이 장기화하다 최종 결렬되면 북한이 실제 핵ㆍ미사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다.

“북한의 위협은 협상에 임하는 압박 전술이다. 미국의 선의에 기대서 핵을 버리고 경제에 올인하겠다고 결정했지만 미국이 오판하고 밀어붙이는 상황에서 더 이상 견지하기 어렵게 됐다고 인민들에게 설명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국제사회에서 더 신뢰할 수 없는 국가로 전락할 뿐이다.”

_김정은 만큼이나 트럼프도 불신과 의심의 대상이다.

“일본의 대북 전문가인 오고노기 마사오 게이오대 명예교수가 어떤 대담 자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운이 좋다. 때마침 김정은과 트럼프를 만나 비핵화를 성사시킬 좋은 기회를 얻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남북미 관계에서 보다 객관적일 수 있는 일본 전문가가 트럼프 대통령의 진정성을 인정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트럼프는 이방인이라서 군산복합체의 이해관계와도 떨어져 있다. 또 동북아를 둘러싼 미중 패권경쟁에 돌입한 입장에서 보면 난사군도 등 남중국해에 군사외교적 역량을 집중시킬 필요도 있다. 세계 전략적 차원으로 접근한다면 트럼프 대통령이 한반도의 마이너한 전쟁은 끝내고 주력 전장으로 넘어가는 게 낫다고 판단할 수 있다.”

_미국 조야에서는 남북관계가 북핵 협상을 추월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 사인이 계속 나오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운전자론을 구속하는 장애물이 아닐까.

“남북관계가 북핵 협상에 공동보조를 취해야 한다는 주장은 미국이 움직이기 전에 남한은 움직이지 말라는 이야기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한미정상회담에서 한반도 운전자론에 동의해 준 이상 문 대통령의 역할을 인정해야 한다. 문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을 판문점에서 두 번째로 만나 불발 직전의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살려낸 것처럼 이번에도 김정은 위원장의 답방을 설득해 2차 북미 정상회담의 모멘텀을 살려야 한다.”

김정곤 논설위원 jk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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