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시험사회

입력
2018.11.16 04:40
31면

능력은 존중의 대상이나 능력주의는 권력의 통치 장치다. 능력은 기회와 자원을 배분하는 합리적 근거 중 하나다. 그러나 능력에 따른 분배마저도 공정하기 위해서는 정의로운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불행하게도 세계는 평평하지 않고 동일한 출발선은 없는 게 인간사회다. 개인의 능력은 사(私)적이지 않다. 사회적이다. 부모의 재력과 수능 점수는 높은 상관관계(+)에 있고, 학연이나 지연 따위의 사회자본이 개인의 능력을 미리 결정한다. 영국 사회학자 마이클 영은 자신의 소설 ‘능력주의의 부상’에서 귀족주의(aristocracy)를 타파한 능력주의(meritocracy)가 외려 ‘불평등을 위한 기회균등 제도’로 전락했음을 풍자했다.

능력주의는 시험이라는 꽤 세련된 통치 장치를 내장하고 있다. 이 도구는 교묘하고 강력하다. 피지배자로 하여금 능력주의를 내면화하고 스스로 욕망케 하기 때문이다. 한 줌도 안 되는 신화는 이들의 자발적 수용을 확대 재생산한다. 내 기억으론, 학력고사 전국 수석은 “예닐곱 시간을 충분히 자고 교과서 위주로 공부한 자”가 늘 차지했다. “공부는 제일 쉬운 것”이어서 명문대학은 고된 노동을 견디면서도 독학으로 합격할 수 있는 것이었다. 재벌기업의 상무는 고졸이면 충분하다는 학력 타파 신화까지 종류도 가지가지였다. 소가 웃을 일이지만, 사실로 믿고 싶었고 실제 믿었던 게 우리들 아니었나. 그 사이 시험은 누구에게나 개방된 공정한 사다리가 됐고, 우리는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약진의 발판으로 삼을” 석차 획득 전투에 돌입했다. 근본적 물음은 삭제됐다. 경쟁을 요구하기 앞서 그 대상이 될 기회 자체를 충분히 창출하고, 능력 개발을 위한 교육 투자를 확대해야 할 국가의 소임, 수십조 원을 퍼붓고도 일자리를 고작 오천 개 정도밖에 못 만드는 허약한 경제의 책임, 성과만을 강요할 뿐 인적자원개발 투자에는 인색한 자본의 행태 등은 질문에서 사라진다.

국가(정치권력)와 자본(경제권력)은 시험으로 우리를 쉽게 포획했다. 한때 시험은 변혁의 도구였다. 고려 광종 때 도입된 과거시험은 문벌 귀족을 혁파하기 위한 조처였다. 광해군 때 임숙영은 시험에 근대의 열망을 담기도 했다. “관직은 재능으로 천거해야 하며, 벼슬은 능력으로 선발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공(公)’이라 했고 반대로 하는 것을 ‘사(私)’라 했습니다(이경숙, ‘시험국민의 탄생’ㆍ푸른역사).” 그러나 신분 타파라는 공적 정의를 추구했던 시험은 서열주의라는 사적 불의를 제도화하는 도구로 타락했다. 시험은 서열을 배분한다. 한국의 서열은 막대한 위치에너지를 갖는다. 국민은 “기득권이 인정해 주는 범주 안에서 스스로 강렬히 (서열을) 욕망하는 주체(위 책, 111쪽)”가 될 뿐이다. 공정성 시비가 끊이지 않음에도 시험에 대한 국민적 호응이 절대적인 이유가 이것일까. 시험 말고는 뾰족한 대안이 없는데다 조선사회에 버금가는 서열주의에 대한 체념적 수용의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정규직 노조도 시험에 빠졌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난항이다. 인천국제공항공사의 경우, 비정규직을 직접 고용하는 대신 자회사를 설립해 그곳의 정규직으로 채용한다는 데, 이들의 처우를 둘러싸고 파행이 거듭되는 모양이다. 기간제 교사는 아예 전환 대상에서마저 제외됐다. 그 기저에는 시험이 자리한다. 정규직의 사회적 석차는 몇 등쯤 될까. 입사시험을 통과한 정규직의 능력은 비정규직에 비해 얼마나 월등할까. 임용시험 출신 교사들은 또 어떠할까. 시험에 합격한 이들의 노력은 존중돼야 한다. 그러나 시험에 대한 보상이 절대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 수준은 사회가 정하는 문제인 만큼 이를 질문에 부쳐야 한다. 수능이 막 끝났다. 통치 장치이건 뭐건 간에, 수험생은 죄가 없다. 모두 수고 많았다. 행운을 빈다.

신은종 단국대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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