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무 칼럼] 척화파 김상헌과 주화파 최명길

입력
2018.11.16 04:40
29면

우리 민족이 참혹하게 시련을 당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생각해보면 우리 민족은 참으로 많은 시련을 겪으며 살아왔다. 가장 큰 수난이야 임진왜란, 그 다음이 병자호란이었지만 경술년 망국이 시련의 극치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남한산성으로 피난 간 인조, 그를 따라간 수많은 고관대작들, 산성을 포위한 청군의 기세는 꺾일 줄 모르고 나라 곳곳에서는 패전 소식만 날아들었다. 시간이 흐르자 산성 안에 비축된 물자는 바닥이 나고 혹한의 날씨는 계속되어, 잘못하면 성안의 모두가 몰살을 당하고 만다는 불안이 커지기만 했다. 강화도까지 무너져 비극은 더 커지자 청군에게 항복을 하자는 주화파와 모두가 죽더라도 끝까지 싸우자는 척화파로 다투기 시작했다.

예조판서 김상헌(1570∼1652)이 척화파의 대표요, 이조판서 최명길(1586∼1647)이 주화파의 대표였다. 청군에 항복하여 목숨이라도 구하자는 주화파의 입장은 의리상으로는 분명히 궁색했다. 척화파 쪽에서는 최명길에게 ‘매국노’니, ‘만고소인’이니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막말을 퍼부었지만, 아무리 비굴한 일이라도 모두 죽는 것보다는 일단 살아나고 봐야 한다는 절박한 주장 또한 물리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정말로 명쾌한 이론으로 시비를 가려내는 일은 참으로 어렵던 시절이었다. 갑론을박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위기는 고조되고, 목숨이 걸린 일이어서 우왕좌왕하는 혼란만 이어졌다.

끝내 최명길은 항복문서를 직접 작성하였다. 이를 본 김상헌은 달려들어 항복문서를 갈기갈기 찢고 말았다. 그때 최명길이 찢어진 종이들을 모아 다시 풀로 붙이며 했던 말이 전해지고 있다.

“항복문서를 찢는 사람도 없어서는 안되지만, 항복문서를 다시 붙이는 사람도 마땅히 있어야 한다(裂書者不可無 補書者 亦宜有)”라면서 찢긴 문서를 온전하게 붙여서 청군에 보내고, 인조는 무릎을 꿇고 항복하여 목숨은 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래서 삼전도에 청나라 임금의 공덕을 칭송하는 비가 세워졌고 조선이라는 나라는 세기의 치욕을 당하고 말았다.

이런 난감한 일이 세상에 어디 또 있겠는가, 일에는 옳은 일 아니면 그른 일, 즉 시비가 있기 마련인데, 어떤 경우 이 일도 옳고 저 일도 옳은 경우의 처신이 어렵다는 것이다.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주장, 문명국인 조선의 국왕이 어떻게 야만족인 청의 임금에게 항복을 하느냐는 주장 또한 그르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전쟁에 지고나자 척화파들은 모두 청국의 심양으로 끌려가 감옥에 갇히고 만다. 늙은 신하 김상헌은 조국을 떠나면서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세월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라는 시조 한 수를 남기고 의연하게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민족의 서러움이 바로 그 짤막한 시에 담겨 있다. 항복을 막으려고 몇 차례 물에 투신하고, 목을 매어 죽으려 했으나 옆에서 막아주어 그런 순국도 못하고, 단식도 했지만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아 감옥살이를 하던 그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 것인가.

뒤에 최명길 또한 명나라와 내통을 했다는 이유로 심양의 감옥으로 끌려오고 말았다. 조선의 노 대감들이 같은 감옥에서 다투지도 못하고 진정으로 화의를 맺어야 하는 아이러니한 처지가 되었다. 두 사람은 시를 지어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해, 목표는 나라와 국민을 위하는 일이었다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때 감옥에 함께 있던 백강 이경여(李景與 뒷날 영의정)는 두 분이 화해한 이유를 시로 밝혔다. “두 노인의 정도(正道)와 권도(權道) 공(公)을 위한 일이었으니, 하늘이 내려준 대절(大節), 시대를 구제하는 공로였노라(二老經權各爲公 擎天大節濟時功)”고 하였다. 일체의 사심을 버리고 척화나 주화가 모두 나라와 국민을 위한 공심(公心)에서 나온 일이었기 때문에 두 주장이 모두 옳아 그들은 어렵지 않게 마음을 풀고 화해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었다.

이 대목에서 새로운 판단의 기준이 나오게 되었다. 일이란 옳은 일 아니면 그른 일이어서 언제나 시비(是非)로 나뉘지만, 더러는 둘 다 그르기도 한 양비(兩非)가 있고, 둘 다 옳은 양시(兩是)가 있다. 백이ㆍ숙제가 무왕의 말고삐를 붙들고 신하가 임금을 쳐서야 되느냐고 간곡히 만류할 때, 백이ㆍ숙제는 옳기만 했고,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잘못된 임금을 방벌하는 무왕의 일 또한 옳기만 했다. 그게 바로 시비가 아닌 ‘양시’였었다. 나라를 빼앗으려던 일본이야 그르기 짝이 없었는데, 그런 일본을 도와 나라가 망하게 했던 친일파 5적들은 더 나빴으니, 그들이야말로 ‘양비’가 아닌가.

권력을 영속화하려고 온갖 악행을 저지르던 독재자에게 부역하던 그 많은 고관대작들, 그들은 모두 그른 양비였다. 요즘의 여당과 야당의 싸움, 극한적인 대립만 일삼는 정치싸움, 과연 그들은 공심으로 싸우는가, 아니면 사심과 당심에 얽매어 그런 일을 하는가 판단해야 한다. 김상헌과 최명길의 싸움처럼 사심과 당심을 버리고 공심으로만 싸운다면 세상이 얼마나 좋아질 것인가. 그런 싸움이 그리워만 진다.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ㆍ우석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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