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위기는 틈새로 온다

입력
2018.11.14 18:00
30면

고용절벽이 조만간 고용지옥 된다는데

추상적 어젠다로 해결 가능하지 않아

‘실세’ 얘기 나오는 것은 정권 이상징후

‘안보 불감증’이라는 용어가 있다.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권은 틈만 나면 국가안보를 핑계로 인권을 탄압했다. 이런 상황이 오랜 기간 지속하자 우리 사회는 안보 불감증에 걸렸다. 안보가 중요한데 아무리 정권이 안보를 강조해도 국민은 무신경했다. ‘안보 냉소주의’에 빠진 것이다. 그래서 정작 북한의 도발 징후가 있어도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지금은 ‘경제위기 불감증’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히려 정부에 긴장감이 흐르지 않는다. 극복할 자신이 있거나 애써 무시하는 것, 둘 중 하나다. 전자면 확신이지만 후자면 ‘위기 냉소주의’로 지금은 후자에 가까운 것 같다. 역대 정부에서 경제위기는 늘 정치에 이용당했다는 기억이 없지 않다. 그렇다고 정부 스스로 냉소주의에 빠지는 것은 위험하다. 경제에서 실정을 하면 정권이 뒤집힌다. 외국도 예외가 아니다. 경제를 챙겨야 정권이 존속한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다. 그래서 어느 정부든 경제를 최우선 순위로 챙긴다. 정부마다 무리하게 부양정책을 쓰는 것도 그런 이유다.

문재인 정부는 좀 다른 것 같다. 말로는 ‘일자리 정부’라고 했지만, 행태는 경제나 성장이 최우선 순위가 아닌 것 같다. 소득주도성장은 분배정책에 가까워 성장정책과는 결이 많이 다르다. 문성현 경제사회노동위원장도 소득주도성장 등의 어젠다는 너무 포괄적이고 추상적이라고 지적했다. 개념이 모호하니 실행계획도 갈피를 잡기 쉽지 않다.

정부가 경제위기설을 차단하기에 급급하고 원인을 전 정부에 떠넘기려 하는 경향도 있다. 강신욱 통계청장이 경기가 하강 국면에 돌입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경기 정점을 지난해 2분기(4~6월)로 추정한 것에 유치한 냄새가 난다. 지난해 5월에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했기 때문에 위기의 진원지는 전 정부라는 뉘앙스다.

지금은 그런 진원지를 가릴 때가 아니다. 김대중 정부는 출범 초기 외환위기를 초래한 김영삼 정부의 실책을 가릴 시간적 여유조차 없었다. 너무 급박했기 때문이다. 내년 이후는 외환위기 때보다 훨씬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이 적지 않다. 지금은 고용절벽이지만 내년에는 고용지옥이 될 것이라고 한다. 핑계거리를 찾을 때가 아니라는 얘기다.

정부가 이데올로기의 울타리에 갇혀 있는 것이 문제다. 이 울타리를 뚫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 집권 집단이 동시대의 유사한 생각을 가졌기에 이견이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기업가 등 자본가를 부르주아, 자영업자를 소자본을 가진 프티 부르주아로 지목해 적대세력으로 간주하는 구태의연한 관점이 대표적이다. 이런 낡은 구도로는 우리 경제의 성장동력을 찾을 수가 없다. 1980년대 후반 대학 강단에서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운동권은 공부 좀 하라”고 일갈한 얘기가 회자된 적이 있다. 그들이 지금 집권 주류 세력이다.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선언했던 다니엘 벨이 ‘나쁜 정부’에 대해 몇 가지 특징을 제시한 바 있다. “이데올로기 대립이 종결된 탈산업 시대에 더는 이데올로기가 사회를 주도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데올로기에 따라 정책을 결정하고 수행하는 정부는 나쁜 정부다. 또 부유한 사람들은 보수적 정책, 가난한 사람들은 진보적 정책을 지지한다고 예단해 버리기 때문에 많은 시민이 정치를 외면하고, 정부에 대한 신뢰도 나날이 떨어진다.” (‘좋은 정부 나쁜 정부’, 박희봉 저)

문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한마디로 ‘자립형’이냐 ‘옹립형’이냐의 차이다. 노 전 대통령은 스스로 개척했으나, 문 대통령은 주변의 옹립에 의해 자리에 올랐다. 옹립형은 그만큼 국가 통치에서 지분이 약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정책 결정 과정에서 노무현 식의 과감한 정면 돌파는 없고, 공론화 방식을 통해 이슈를 회피하거나 미루는 행태가 잦아 실망스럽다. 특히 인사 행태를 보면 대통령의 의중이 아니라는 분석도 많다. 벌써 ‘실세가 누구’라는 얘기가 거론되는 것은 정권의 이상징후다. 그 틈새로 위기가 찾아오는 법이다.

조재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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