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필의 제5원소] 상대성이론과 양심적 병역 거부

입력
2018.11.14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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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꼭 100년이 되는 날이었다. 1914년 6월 사라예보의 총성이 울린 뒤 전사자만 거의 1,000만 명에 이르렀던 인류사의 비극이 이날 막을 내렸다. 1914년 당시 유럽 주요 국가 중에서 징병제를 실시하지 않은 유일한 국가가 영국이었다. 영국은 1914년 8월4일 독일에 선전포고하며 전쟁에 뛰어들게 된다. 1차 대전 때 영국에서 새로운 병역법이 통과된 것은 1916년 1월이었고, 이 법에 따라 그해 3월부터 징병제가 시행되었다. 당시 캠브리지 대학의 촉망받는 천문학자 아서 에딩턴도 징집대상자였다. 퀘이커 교도였던 에딩턴은 종교적인 이유로 양심적인 병역거부를 신청할 참이었다. 놀랍게도 1916년의 병역법은 정당한 사유가 있을 경우 병역 거부자가 병역을 면제받거나 대체복무를 하거나 비전투병으로 복무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에딩턴은 캠브리지 대학의 도움으로 병역을 면제받았으나 1918년 병무청이 이에 항소하자 에딩턴은 양심적 병역 거부를 신청했다.

그때 에딩턴은 왕실 천문학자였던 프랭크 다이슨과 함께 1919년 5월29일로 예정된 일식을 탐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식탐사가 중요했던 이유는 아인슈타인 때문이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서는 무거운 물체 주변의 시공간이 휘어진다. 태양 주변의 시공간도 휘어진다. 아주 멀리서 태양을 스쳐 지구에 도달하는 별빛은 태양 주변의 휘어진 시공간의 최단경로를 따라 진행하기 때문에 지구에서 바라 본 별의 겉보기 위치는 별의 원래 위치와 다르다. 따라서 태양 바로 옆에 보이는 별의 위치와 원래의 위치를 비교하면 일반상대성이론을 검증할 수 있다.

그러나 밝은 태양 바로 옆의 별을 관측하기란 어렵다. 일식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이론을 최종적으로 완성하기 전부터 천문학자들에게 일식탐사를 권유하고 다녔다. 먼저 일식 때 태양 주변의 별을 촬영한다. 그리고 일식 6개월 전이나 6개월 뒤에 똑같은 별의 사진을 찍는다. 이때는 별빛이 태양 옆을 지나지 않고 지구로 바로 들어오기 때문에 정확한 별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두 사진을 비교하면 일반상대성이론을 검증할 수 있다.

에딩턴은 당시 상대성이론을 제대로 이해한 몇 안 되는 과학자들 중 한 명이었다. 특히나 적국인 독일 과학자의 이론을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영국에 소개하고 나섰다. 주변의 따가운 시선과 비난도 있었으나 퀘이커 교도로서의 에딩턴은 평화주의의 길을 걸었다. 1918년 에딩턴은 종교적인 이유로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지위를 인정받아 대체복무를 수행하고 싶다는 의견을 냈으나 군 재판소에서는 1919년의 일식탐사를 조건으로 12개월의 병역 면제를 판결했다.

1차 대전은 1918년 11월11일 막을 내렸고 에딩턴은 예정대로 1919년 5월29일 일식탐사에 나섰다. 우여곡절 끝에 에딩턴은 그해 11월6일 왕립학회에 탐사결과를 보고했다. 아인슈타인의 예측을 뒷받침하는 결과였다. 이튿날 영국의 언론은 뉴턴의 이론이 무너졌다고 대서특필했다. 아인슈타인은 대중적인 슈퍼스타로 발돋움하게 된다. 에딩턴의 일식탐사는 일반상대성이론을 실험적으로 검증한 최초의 사례로 평가받는다.

무려 100년 전에 그것도 세계대전을 치르는 와중에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했던 영국의 사례는 2018년의 우리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남한의 과학자가 전쟁 통에 병역을 면제받고 북한 또는 일본 과학자의 이론을 검증했다고 하면 십중팔구 그 과학자는 빨갱이나 매국노로 몰려 정상적인 생활조차 힘들 것이다. 올해 6월 헌법재판소는 병역거부자를 처벌하는 조항을 합헌이라고 판결하면서도 대체복무의 규정이 없는 병역법 조항은 헌법불합치로 판결했다. 11월 초에는 대법원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무죄로 판결했다. 나는 이번 결정이 대한민국을 문명국가의 반열에 올려놓는 중요한 계기가 되리라 평가한다.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판결을 놓고 우려의 목소리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빙자해 병역을 기피하는 사례를 적발하기 위해 치밀하고도 까다로운 행정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도 걸러지지 않는 기만 사례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문명사회는 모두를 일괄적으로 감옥에 보내는 손쉬운 방법을 택하는 대신 일부러 까다로운 수고를 감수하고서라도 한 사람의 양심을 보호해 주는 방법을 찾는 사회이다.

현역병과의 형평성을 고려해 “길고 험한” 대체복무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높다. 나만 고생한 게 억울하다는 심리는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그러나 문제를 굳이 하향평준화의 방식으로만 풀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현역병의 근무환경과 처우를 획기적으로 개선해 “군대 가면 썩는다”는 인식을 바꾸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

징병제를 모병제로 전환하면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된다. 한반도 평화의 새 시대를 준비하면서 이제는 냉전의 논리를 넘어 국가안보의 패러다임을 새로 짤 필요가 있다. 징병제가 없는 해법도 충분히 생각해 볼만하다.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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