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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한국일보]서울 종로구 한 고시원 건물 뒤편에 마련된 비상계단이 식용유 통 등 각종 물건으로 막혀있다. 손영하 기자

“비상계단? 글쎄요.”

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한 고시원. 7층짜리 건물 6, 7층을 차지하고 있는 고시원을 관리하는 직원은 ‘비상계단이 어디냐’고 묻자 고개를 갸웃했다. 고시원 거주자 안전을 관리하고 책임져야 할 직원이 화재 등 비상사태 발생 시 대피하는 데 가장 중요한 비상계단 위치를 잘 모르고 있던 것. 그는 잠시 뜸들인 후에야 건물 뒤쪽을 손으로 조심스레 가리켰다.

존재가 불분명했던, 검은색 철제 비상계단은 예상대로 ‘방치’돼 있었다. 외벽에 위태롭게 달린 계단의 폭 자체가 한 사람 겨우 다닐 수 있을 정도로 협소한 것은 둘째치고, 계단 곳곳이 쓰레기더미라 걸음걸음마다 힘겨웠다. 쓰레기를 피해 7층에서 2층까지 내려왔지만 계단은 거기서 끝. 1층 땅바닥까지 가려면 2층에서 뛰어내리는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한 눈에 봐도 사용은커녕 관리조차 되지 않고 있는 상태. 심지어 인화성물질인 식용유가 가득 담긴 통도 널브러져 있었다. 옥상에서 만난 고시원 거주자 이모(63)씨는 “비상계단이 거기에 있는 줄도 몰랐다”고 한 뒤 한숨을 내쉬었다. “불 나면 여기도 큰일이 나겠네.”

서울 도심 곳곳을 채우고 있는 고시원은 여전히 화재 사각지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불에 취약한 노후건물 안에 있는 데다, 대부분 각종 화재 안전시설마저 갖추지 않았다. 특히 불이 났을 경우 발 빠른 대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비상계단이나 완강기 등은 방치된 채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실제 12일 본보 기자들이 종로구와 관악구 등 고시원 밀집지역을 돌아본 결과, 화재라는 만약의 사태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춘 고시원은 거의 없었다. 관수동 국일고시원처럼 출입구 쪽에서 불이 나 거주자들이 제때 피할 수 있는 통로가 막힐 경우, 사실상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는 곳이 태반이다.

우선 ‘출입구’ 관리가 엉망이다. 관악구 한 고시원(5층 건물 3, 4층 위치)은 출입구 앞에 스티로폼, 일반 쓰레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곳은 건물 안에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 심지어 이 쓰레기들 바로 옆에는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재떨이까지 마련돼 있었다. ‘당장 불이 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지적이 이상할 게 없었다.

계단도 위험천만. 법 상 자전거 등 생활용품을 둬서는 안되지만, 이 고시원은 계단의 절반 가까이를 ‘신발장’이 차지하고 있었다. 폭은 단 ‘50㎝’, 성인 남성 두 명이 함께 내려가는 건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어떤 지적도, 개선 요구도 없었다. 고시원 총무 A씨는 “한 달 전에 소방안전점검을 받았지만, 탈출 통로에 장애물이 많다고 지적 받은 적은 없다”고 말했다.

출입구와 계단이 막힌다면 결국 창문을 통해 건물 밖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다. 이때 필요한 게 몸에 밧줄을 매고 땅으로 내려올 수 있는 완강기다. 하지만 완강기가 없거나 있어도 무용지물인 곳이 대부분이다. 영등포구 한 고시원(5층 건물, 4층 위치)에 사는 정모(34)씨는 “완강기가 뭔지도 잘 모르고, 그런 게 여기에 있다 해도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종로구 한 고시원(5층 건물 3, 4, 5층 위치)은 4층에 완강기를 뒀지만, 정작 각종 짐들 사이에 가려져 있었다. 거주자 한모(39)씨는 “있다는 건 알지만 사실 사용법도 모른다”고 털어놨다.

종로2가에 위치한 K고시원은 9일 화재 소식을 듣고 그나마 ‘개별 전열기구 사용금지’ ‘피난안내도 숙지’ ‘화재 발생 시 행동요령’ 등을 알리는 안내문을 붙였다. 하지만 총무를 맡고 있는 직원은 “공지사항으로 붙여도 결국은 자발적으로 봐야 하는 수준”이라고 했다. 결국 대피 등 자신의 몸은 스스로 알아서 챙겨야 한다는 얘기다. 현재 서울시 고시원은 5,840곳에 달한다.

[저작권 한국일보]서울 관악구 한 고시원에 설치된 완강기가 선풍기와 TV로 가려져 있다. 박진만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서울 종로구 한 고시원은 9일 발생한 국일고시원 화재 사고 당일 화재 대피 요령이 담긴 안내문을 붙였다. 손영하 기자

이상무 기자 allclear@hankookilbo.com

박진만 기자 bpbd@hankookilbo.com

손영하 기자 froze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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