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 추상명사 빼고 말하면 안 될까요

입력
2018.11.13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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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시스템을 아는 사람이 없었고 알려고 하는 사람이 없어서 더욱더 시스템을 알 수 없었다.’ 지난 10월 국회 보건복지위 국정감사에 참고인으로 출석한 이국종 아주대병원 권역외상센터 소장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권역외상센터 실태를 책 ‘골든아워’에 이렇게 썼다. 연합뉴스
‘아무도 시스템을 아는 사람이 없었고 알려고 하는 사람이 없어서 더욱더 시스템을 알 수 없었다.’ 지난 10월 국회 보건복지위 국정감사에 참고인으로 출석한 이국종 아주대병원 권역외상센터 소장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권역외상센터 실태를 책 ‘골든아워’에 이렇게 썼다. 연합뉴스

영화로도 제작된 앤트맨, 원더우먼 등의 만화책 대본을 쓴 중국계 미국인 에이미 추가 작가가 된 건 대학시절 발행한 아시아계 미국인을 위한 잡지 ‘A매거진’의 영향이 컸다. 인터뷰에서 잡지 발행 계기를 묻는 내게 “우리 목소리가 없었기 때문”이란 도덕적인 멘트를 날린 그는 심드렁한 내 표정을 보고 다음 이유를 덧붙였다. “그래서 시장 잠재력이 커 보였다.”

에이미는 이때 만난 친구와 만화책 출판사를 차렸고, 만화 스토리 작가가 됐다. 여성 독자를 타깃으로 한 ‘알파걸 코믹스’다. 역시 직접적 이유는 시장성이다. 컨설턴트 출신인 그는 미국 내 만화책 매출액을 분석했고 2010년 주체적 여성을 주연으로 한 SF물 ‘사가’의 매출이 마블, DC코믹스 대표작 매출을 넘어선 걸 확인한 이듬해 저 출판사를 차렸다. 이렇게 만든 회사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그릴 수는 없을 터, 직원의 절반 이상을 여성으로 뽑았다.

페미니즘의 도도한 흐름에 맞춰 한국도 젠더감수성에 눈뜨자는 말이 아니다. 선한 의도가 선한 결과를 담보하지 않는다는 건 인간 사회의 상식, 사회를 바꾸는 건 당위적 명분이 아니라 현실의 권력 작용을 통해서라는 말이다. 에이미 추의 가치는 성별과 인종 다양성을 담은 콘텐츠를 만든 시도가 아니라, 그런 콘텐츠를 성공시키며 사회변화를 이끈 영리함과 영향력에 있다.

혐오와 가짜뉴스가 판치는 작금의 한국에서 ‘에이미적 갈등 접근법’이 필요하지 않을까. 갈등이 터지면 명분과 도덕률을 앞세우고 남 탓하기보다, 원인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실질적인 해결책을 찾자는 말이다. 이를테면 외신에서 ‘히스테리적 증상’이라 부르는 한국인의 이슬람 난민혐오는 △‘이슬람은 테러분자’로 요약되는 서구 보도 프레임을 국내 언론이 반복하며 확대 재생산된 고정관념 △경제 불황으로 인한 불안과 분노 △제주에 떨어진 예멘 난민의 9할이 하필 건강한 2,30대 남성-인구 구성이 너무 비정상적이지 않은가-이란 ‘팩트’가 맞물린 결과다. 합리적 공포를 제기한 일반을 ‘나쁜 사람’으로 치부한 기사에 ‘감성팔이’란 댓글이 달리는 건 당연하다. 이 과정에서 가짜뉴스가 생산, 유포된 사실을 염두 하더라도 국가 위상 운운하며 “우리도 한 때 난민이었다”는 식의 인도주의만 내세운 학자들의 칼럼은 지적 태만의 전형으로 꼽을만하다.

이민과 난민에 대한 사회적 갈등은 2050년 한국 인구의 35%가 이민자로 채워질 것이란 현실(2006년 국제통화기금 전망치)을 가정하고 고민하는 게 생산적이다. 사회적 대화는 이주민 혐오 사회에서 한국인도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독일의 외국인 무상교육은 가진 자의 선의가 아니라 ‘옆집 아이가 행복해야 내 아이가 안전하다’는 인식에서 비롯됐다.

“추상명사 빼면 답변이 불가능 한가요.” 이른바 전문가라는 공무원, 연구원, 학자를 인터뷰할 때 내가 추임새처럼 붙이는 말이다. 창조경제나 적폐청산 같은, 주어도 대상도 목적도 불분명한 추상명사는 대형 사고나 비리가 터질 때야 비판의 대상이 된다. 이때 전문가들의 ‘분석’을 요약하면 대개 그 추상명사를 떠받칠 시스템이 없거나, 시스템끼리 협업이 안 되거나, ‘견제 시스템’ 부재에서 비롯된 태만 또는 비리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 요컨대 의도는 선했으나 디테일에서 실패했다.

‘목소리 가진 분들’이 유독 디테일에 취약한 탓에 한국은 아시아 국가 최초로 난민법을 채택하고도 인구 1,000명당 난민 수용률이 세계 꼴찌 수준(유엔난민기구 2017년 기준 139위)이고, 연간 국비만 100억원 이상 드는 닥터헬기를 낮에만 운영한다. 온라인 불법 콘텐츠를 걸러내는 ‘DNA 필터링’ 기술을 10년 전에 개발했지만 웹하드 회사들이 운영하는 홈페이지에는 지금도 불법 동영상이 판친다. 우리는 언제쯤 선한 결과를 만들 사회지도층을 만날 수 있을까.

이윤주 지역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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