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주치의, 옳거니 했다가 한숨만 깊어졌어요

입력
2018.11.13 04:40
수정
2018.11.13 15:16
28면

[장애아 엄마, 세상에 외치다] (4) 허울 좋은 건강주치의

1~3급 중증장애인 100만명, 등록한 주치의는 270명

편히 눈감을 수 있나 했건만… 지속적 치료? 한숨만

장애인 주치의 시범 도입. 일러스트=김경진 기자
장애인 주치의 시범 도입. 일러스트=김경진 기자

정부가 올해 5월부터 장애인 건강주치의 제도를 시범사업으로 진행하기 시작했다. 지적장애 2급의 아들에게도 주치의가 생긴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장애인 자식을 둔 엄마들의 소원이 자식보다 하루만 더 살고 싶다는 것인데, 나 죽고 나서도 아들의 건강을 관리해줄 주치의가 있다면 굳이 아들보다 오래 살려고 발버둥 치지 않아도 될 것만 같다.

“하하하. 잘 살아. 얘들아. 엄마는 할 만큼 했으니 이제 편하게 쉬러 간다.” 이런 말을 하면서 눈 감는 게 평생의 소원이다.

그런 소원을 이루기 위해 들뜬 마음에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는데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하아~”하고 한숨 소리가 깊어진다. 이름만 들으면 엄청 멋져 보이는 장애인 건강주치의 제도, 실효성 측면에서 의문이 드는 것이다.

사실 주치의 제도는 장애인이기에 더욱 필요하다. 특별한 신체적 정신적 상태를 잘 이해하고 있는 주치의의 지속적인 관찰이 장애인의 ’건강한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건 당연하다. 하지만 현실은 갑갑하다. 시계를 10년 전으로 돌려본다. 그 누구보다 주치의가 절실했지만 정작 아무도 주치의가 되어주지 않아 막막했던 10년의 시간을 되돌아본다.

◇밥 먹듯 대학병원 다녔는데 네 살 돼서야 장애 판정

아들은 임신 28주 5일에 이른둥이로 태어났다. 양수가 터진 쌍둥이 딸은 무사히 태어났지만 후발 주자인 아들은 뱃속에서 나오질 못하고 한 시간 가까이 버티다 결국 출산 시에 호흡이 잠깐 멈추고 뇌출혈이 왔다.

대한민국 최고라 자부하는 대학병원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두 돌이 되기까지 밥 먹듯 병원을 드나들었다. 이른둥이로 태어나면 여러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서 갖가지 검사와 지속적인 관찰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엄마가 처음인 난 그저 병원에서 오라는 대로 가라는 대로 이 과 저 과를 오고 가며 이 검사 저 검사를 다 받았다. 당시 기록을 보면 검사받고 진료를 보기 위해 많을 때는 한 달에 8번을 병원에 간 적도 있다.

어디 그 뿐이랴. 제 속도대로 커가는 딸과 달리 아들은 발달이 느렸기 때문에 (장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꿈에서조차 하지 못한 채) 일단 대학병원에서 물리치료와 작업치료를 시작했다. 그게 주 2회였던가 3회였던가. 검사는 검사대로 받고, 진료는 진료대로 보면서, 재활치료는 재활치료대로 받았다. 아이들 어릴 때를 회상하면 먹고 자고 일어나 병원에 다닌 것만 생각난다.

밥 먹듯 찾아다닌 대학병원이다. 의사를 만나도 수시로 만났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각 과별로 돌아가며 정기적으로 만났다. 하지만 나는 아들의 장애 여부를 4살이 될 때까지도 들을 수 없었다.

이런 식이었다. 뇌 자기공명영상(MRI) 결과를 듣기 위해 한 시간 넘게 우는 애들을 달래며 기다린 다음 3분에서 5분 동안 의사를 만나면 이런 대화가 오갔다.

“MRI 결과 큰 이상은 없습니다.”

“어머.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뇌의 주름이 덜 쪼글쪼글하군요”

“네? 그게 뭔가요? 안 좋은 건가요?”

“아뇨. 꼭 그렇지는 않고요.“

그리고는 온갖 의료용어를 동원한 설명이 이어진다. 4년제 대학을 나오고 한 때는 신문사 기자로까지 활동했지만 의미들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이런 의심을 지울 수 없다. 뇌의 주름이 덜 쪼글쪼글하다는 것은 지적인 영역에서 장애의 예후가 나타난다는 의미였고, 그것을 의사들은 이미 알고 있었을 거라는 것. 하지만 그 누구도 내게 아들의 장애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물어보면 “조금 더 클 때까지 지켜봅시다”라는 말로 미뤘고 그러다 아들은 네 살이 되었다.

지금이야 손안에 있는 스마트폰으로 즉시 검색을 해보면 되지만 10년 전만 해도 딴 세상이었다. 그때는 남편이 ‘터치폰’이라 불리는 현재 스마트폰의 ‘할아버지’격 모델을 쓰고 있었고 나는 핑크색 2G 폴더폰을 쓰던 때였다. 쌍둥이를 키우고 병원 다니느라 하루 한 두 시간 자기도 빠듯했던 내가 한가하게 노트북 켜고 인터넷 검색할 여유가 없었다는 뜻이다.

아들의 장애를 알게 된 건 네 살이 되어서였다. 4년 동안 그랬듯 한 시간 기다려 3분 동안 똑같은 말만 듣고 오던 어느 날 어느 과인지도 기억 안나는 의사가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했다. “잘생겼는데 아깝게 됐네.”

아깝게 됐네. 아깝게 됐네. 아깝게 됐네…. 속으로 되뇌다 그때 알았다. 확신이 왔다. 의사들은 알고 있었다. 아들은 장애가 있었다. 크나큰 배신감을 느낀 난 그 길로 대학병원에 발을 끊고 동네 재활병원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정식으로 장애등급검사를 받고 온갖 치료들을 새롭게 시작했다.

◇동네병원도 전문적 관리 안 돼 실망

동네병원으로 옮기면서 난 뭔가 크게 바뀔 것이란 기대를 했다. 이제 집 가까운 곳에서 아들의 ‘장애’를 전문적으로 관리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였다. 하지만 동네병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진료시간은 3분에서 5분을 넘지 않았고, 진료를 받으러 가면 언어치료, 심리치료, 재활치료, 작업치료 등등 치료들을 계속 이어가라는 ‘오더’만 받았다.

이런 현실이다 보니 자식이 어릴 때는 많은 부모들이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다 학령기에 접어들면서 점차 병원으로의 발길을 끊는다. 특별히 복용하는 약물이 있는 게 아니라면 굳이 병원이 아니어도 재활치료를 받을 수 있는 센터는 널려있기 때문에 의사를 찾지 않는 것이다. 사실 전문성을 지닌 의사의 지속적인 관찰이 가장 중요한 게 장애의 영역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장애란 것은 막막한 것이다. 특히 발달장애는 더욱 더. 살면서 지적장애나 자폐란 단어는 TV나 책에서만 봤던 단어다. 당장 내 자식이 발달장애인이 되었는데도 엄마인 난 그저 치료실만 열심히 데리고 다니는 것 외엔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삶’이 ‘장애’에 가로막혀 버리는 것이다.

자식의 장애를 대면했을 때 처음으로 만나는 전문가 집단이 바로 의사다. 부모 입장에선 그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의사들은 의지처가 되어주지 못한다. 내가 만나 본 의사들은 장애를 질병의 한 종류로만 다루었으며, 그랬기 때문에 치료 처방을 내리는 것 외에는 딱히 해 줄 말도 없었다.

내 아들은 장애인이기도 하지만 사람이기도 한데, 단지 ‘장애’가 있어서 특별한 지원이 필요한 사람일 뿐인데, 의사 앞에만 서면 ‘장애’라는 질병을 가진 ‘장애인’이 되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장애인의 ‘건강’을 넘어 ‘건강한 삶’에까지 의사들이 개입한다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이제 도입하려는 것이 장애인 건강주치의 제도라 한다. 1~3급의 중증 장애인이 의사 1명을 선택해 만성질환이나 장애 유형별 건강문제 등을 지속적, 포괄적으로 관리받을 수 있게 한단다. 지속성이 핵심이다. 내 아들의 상태를 잘 이해하고 있는 한 명의 주치의가 아들의 건강문제를 전반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면 단순 건강을 넘어 그들의 ‘건강한 삶’에까지 개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파고드니 이것도 영 실효성이 없겠다 싶다. 보건복지부에서 지난 5월 장애인 건강주치의 공모를 마감한 결과 226개의 의료기관에서 396명의 의사가 신청을 했다. 하지만 8시간의 집합 교육을 이수하지 않거나, 교육을 받고 나서도 정작 등록은 하지 않아 지금 현재는 270명만이 장애인 주치의로 활동 중이다. 장애인 주치의 대상자인 1~3급의 중증장애인은 100만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어림 없이 못 미치는 수치다.

◇접근성-전문성 잇는 의사 협업 네트워크 필요

지금 내 아들의 주치의는 사실상 동네 소아과 의사다. 발달장애에 대해선 아는 게 거의 없는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지만 10년 간 아들의 건강을 책임져 왔다. 이젠 척하면 척이다.

진짜 주치의라는 건 이래야 하는 게 아닐까? 집에서 가까운 접근성 좋은 병원에 장애인이 수시로 찾아가서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의사. 이게 진짜 장애인 주치의가 아닐까?

그러나 접근성만 따지다 보면 전문성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내 아들이 퇴행을 보이거나 새로운 상동행동 등이 나타났을 땐 소아과 의사가 상담을 해줄 순 없다. 그럴 땐 정신과나 재활과를 가야 한다. 하지만 내 아들이 다니는 병원의 의사들은 서로 각자의 영역에만 충실할 뿐 전혀 연결돼 있지 않다. 그래서 필요하다. 의사들 간의 협업 네트워크 체계.

장애인 건강주치의라는 거창한 사업보다 지금 내 아들에게 절실한 건 바로 그런 것들이다. 그런 것들이 장애인인 내 아들의 건강을, 삶을 보다 현실적으로 단단히 지탱해줄 것이라 믿는다.

류승연 작가 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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