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원로의 품격

입력
2018.11.09 04:40
31면

건축설계에는 답이 없다. 대학에서 첫 설계 수업 때 들은 이야기다. 지금도 많은 학생들이 이 말을 들으며 건축공부를 시작할 것이다. 정해진 답이 없기 때문에 마음에 드는 답이 나올 때까지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도 하게 된다. 밤샘 작업도 한다. 그나마 마음에 드는 계획안이 나오면 다행이지만 내 맘에 든다고 반드시 교수 마음에 드는 건 아니어서 좋지 않은 비평이라도 나오면 깊은 상심에 빠지기도 한다.

건축물은 내가 설계하지만 사용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 건물의 규모가 커질수록 많은 사람이 사용하며 더 많은 주변 환경도 더 많이 고려해야 한다. ‘공공성’이 더 커진다. 그래서 어렵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도 없거니와 막상 지어지면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건물이 지어졌는데 이런저런 문제로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고 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런 결과를 방지하기 위해 옳은 방향을 찾고 가능한 많은 의견을 수용할 수 있도록 여러 단계를 거쳐 건축설계를 한다. 마을 단위, 도시 단위의 큰 영역에서 건축물이 지어질 때는 수많은 전문가들이 나아갈 방향을 검토하여 마스터플랜을 만든다. 마스터플랜은 도시의 미래다. 마스터플랜에 따라 건물들이 지어지면서 도시는 전체적으로 고유의 색깔을 갖게 되는 것이다. 설계자는 반드시 마스터플랜의 방향성을 공유하고 규칙을 지키면서 건물과 길을 설계해야 한다. 그러니까, 마스터플랜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다.

세종시에 신청사를 짓는 건축설계 경기가 논란이다. 공정성을 위해 여러 분야의 심사위원을 두었고 더 좋은 건축을 위해 ‘총괄건축가’ 제도도 두었다. 게다가 국제 현상설계다. 그런데도 심사위원장이 사퇴하고 발주처인 행정안전부와 당선안에 대해 해명을 촉구하는 발언을 한 것이다. 그는 특정한 안을 당선작으로 몰아가는 분위기를 느꼈다고 했다. 문제는 그 안이 마스터플랜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직으로 높은 건물이 대지의 중심에 자리 잡은 계획안을 도저히 수긍할 수 없었던 그는 사퇴를 선택했다. 심사과정을 잘 알 수 없는 외부인인 나는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지만, 문제의 당선안을 살펴보면서 그가 왜 그런 지적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도시는 한 시대에 머무르지 않는다. 수백 년을 갈 수도 있다. 그러하기에 전문가들이 모여서 먼 미래에 이 도시의 모습이 어떻게 되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고 토론한다. 그렇게 해서 큰 그림, 마스터플랜이 만들어진다. 과거에는 마스터플랜이 무용했던 경우도 있었다. 초기 신도시 개발 시기에는 마스터플랜이라고 해 봐야 도로와 땅만 나누어 놓는 정도였기 때문에 ‘마스터플랜’은 쓸모 없고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특히 세종시는 ‘탈중심’이라는 새로운 도시 모델을 목표로 만든 마스터플랜을 기반으로 한다. 그에 따라 건물들은 지어지고 있고 앞으로 지어질 건물들도 있다. 익숙하지 않은 형태로 지어진 건물에서 생활하는 공무원들이 불편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불편함은 다른 방식으로 해소해야지, 도시의 근본을 부정하는 방식은 곤란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마스터플랜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다.

건축가는 인터뷰에서 심사위원장이 사퇴한다고 결과가 번복되지 않겠지만, 이런 소동을 일으키지 않으면 설계경기의 잘못된 관행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인터뷰를 읽으며 마스터플랜의 수호자 역할을 하는 ‘원로’의 존재가 고마웠다. 과거 본인들 잘나갈 때의 방식만 주장하거나 다른 이익에만 눈이 먼 소위 ‘꼰대’가 아니라, 정말 지켜야할 것들을 실천하고 앞서서 목소리를 내는 ‘원로’의 모습이 새롭다. 우리 시대가 원하는 ‘원로의 품격’은 이런 것이 아닐까?

정구원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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