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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20여년 전 일이다. 친척 중에 개인사업자가 있어 종합소득세 신고를 할 때 따라갔던 적이 있다. 외환위기 직전 최대 호황기를 누릴 때라 사업이 제법 잘 된 친척은 세무당국으로부터 900만원에 육박하는 종합소득세를 부과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기준으로 봐도 한꺼번에 납부하긴 많은 금액이었다. “많이 벌었으니 많이 나왔겠지”하며 고지서를 받아든 친척과 나는 걸음을 돌렸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세무당국 관계자라는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부담할 세액이 얼만지 정확히 알았고, 도와주겠다고 했다. 요컨대 자신에게 250만원을 주면 세금을 400만원 수준으로 깎아주겠다는 것이 그가 말한 ‘도움’의 골자였다. 친척은 그의 도움을 거절했고, 회계사무소를 찾아 조금 낮아진 세금을 납부했다. 도움을 제의했던 사람이 세무공무원인지 브로커인지는 지금도 확신할 순 없지만, 대학시절 난 처음으로 직접 ‘세금도둑’을 목격했다.

20여년이 흐른 지금, 세월은 변했다. 촛불혁명으로 부패한 대통령을 끌어내리고 ‘평등-공정-정의’를 외치는 대통령을 맞았다. 부침은 있었지만 국민들의 의식 수준은 높아졌고, 그에 맞는 법제도도 정비됐다. ‘김영란법’이 대표적이다. 예컨대 예전엔 당연시했던 학부모와 교사간 촌지를 이제 당연시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나랏돈은 먼저 찜하는 사람이 임자’라는 인식은 크게 바뀌지 않아 보인다. 아이들 잘 보살피고 교육하라고 준 나랏돈을 명품가방과 성인용품 구입 등에 마구잡이로 쓴 사립어린이집 원장 사례가 이를 대변한다. 일부의 사례라고 치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곳곳에서 제기되는 의혹을 보면 ‘세금 도둑질’은 형태만 변주될 뿐 근절되지는 않은 것 같다.

지난 1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의 ‘2019년도 예산안 공청회’에서 진술인으로 참석한 김태기 단국대 교수의 말이다. “일자리 관련 예산이 워낙 많다 보니 별의별 일이 벌어집니다. 고용브로커가 있는데 이 브로커를 끼면 일자리예산(에 포함된) 지원금, 보조금 받기 편하죠. (중략) 이 부조리는 광범위하게 뿌리 박혀 있습니다.” 김 교수에게 전활 걸어 상세한 브로커들의 활약상(?)을 들어봤다. “지원금, 보조금을 받기 위해서는 요건이 필요한데 브로커들이 그 요건을 만들어줍니다. 그러고선 지원받은 금액의 10~20%를 수수료로 떼어갑니다. 중소기업 정책지원금 빼먹기는 더욱 심각하죠. 정부는 실적 올리느라 감시에 느슨합니다.” 각종 정부 보조금, 지원금이 ‘주머니 속 쌈짓돈’이 되고 있다는 얘기다.

‘세금도둑’ 사례를 찾자면 차고 넘친다. 교육부의 ‘산업연계 교육활성화 선도대학’ 사업, 일명 프라임사업이란 게 있다. 기업이 공대생을 많이 원하니 공대 정원을 늘리는 대신 인문ㆍ사회계열 정원을 줄이는 대학에 정부가 2016년부터 올해까지 6,000억원을 지원한다. 대학들은 사업단까지 꾸려 사업 선정에 혈안이다. 지난 주말 만난 수도권 한 대학 교수는 “프라임사업으로 돈은 받았고 써야 하는 곳은 마땅찮아 결국 학과 경연대회를 열어 수상자에게 상금으로 줘왔다”며 “눈먼 정부돈을 학생들 용돈으로 쥐어준 꼴”이라고 귀띔했다. 혈세 6,000억원이 모두 이런 식으로 쓰이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세금이 허투루 쓰인다는 사실만으로 허탈감이 밀려온다.

정부는 경제가 어렵다며 내년 예산으로 올해보다 9.7%나 증가한 470조5,000억원을 편성해 국회에 제출했다.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한다는 데 어깃장을 놓고 싶진 않다. 다만 국민 세금이 꼭 필요한 곳에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 누군가 자기 주머니에서 꺼내 쓰듯 하진 않는지 철저한 검증이 뒤따르면 좋겠다. 검증 인원이 없다는 하소연은 하지 말자. 단기 일자리로 국립대 에너지 절약 도우미, 라돈 측정 도우미 등을 뽑느니 ‘세금도둑’ 검증하는 도우미를 뽑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겠는가.

이대혁 경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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