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고양이가 없었던 밤

입력
2018.11.07 04:40
31면

나에게는 고양이가 두 마리 있다. 첫째 고양이는 서울 신도림동 출신이다. 노란 줄무늬 고양이, 치즈태비다. 길에서 태어나 장마철에 혼자 목 놓아 울다 구조되어 우리 집에 왔다. 둘째 고양이는 서울 연남동 출신으로, 흰색과 검은색 털이 섞인 턱시도다. 길고양이 엄마가 길에서 출산한 후 동네 캣맘의 집에 다짜고짜 눌러앉아 수유를 하는 바람에, 어려서부터 사람 손을 타 나에게 오기에 이르렀다.(엄마 고양이는 연남동에서 캣맘의 보살핌을 받으며 잘 살고 있다.)

나는 첫째 고양이를 키우기 전까지 동물과 살아 본 적이 없었다. 동물과 살고 싶다는 욕구를 가진 적도 없었다. 일단 돌볼 자신이 없었다. 나는 나 자신의 일상도 제대로 살피지 못하는 사람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반려동물은 사람보다 수명이 짧다. 의식과 지능이 있는 생명을 먼저 떠나보내는 것이 막연히 무서웠다.

고양이를 ‘입양’한 것은 남편 때문이었다. 남편은 대단한 고양이 마니아로, 고양이 사진집 십 수 권과 오랫동안 아낀 고양이 인형, 고양이 그림 작품 등을 갖고 있었고, 고양이 동영상 시청이 취미였다. 시부모님이 싫어해 혼전에 고양이를 키우지 못했던 남편은 결혼으로 분가한 후 ‘고양이 세뇌’를 시작했다. 딱히 호불호가 없던 나는 몇 년에 걸쳐 순조롭게 세뇌되었고, 결국 고양이 입양에 동의했다. 동의한 정도가 아니라, 돌이켜 보니 고양이와 살기로 한 다음에는 공적 절차는 내가 맡는 우리 집의 역할 분담에 따라 내 명의로 입양계약서를 썼다. 이름도 내가 붙였다.

첫째 고양이와 산 지 오 년이 지났다. 집고양이의 평균 수명은 최대 십오 년 정도라고 한다. 첫째 고양이는 길에서 고생을 많이 한 탓인지 썩 건강하지 않다. 아무리 잘 돌보려고 노력해도 평균수명만큼 오래 살아줄 것 같지 않다. 여하튼 그래도 긍정적으로, 아직 삼분의 이는 남았겠지 생각하고 있다.

고양이 두 마리와 살며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다른 생물의 토사물과 분변을 아무렇지도 않게 치우게 되었다. 고양이뿐 아니라, 표범이나 사자 같은 고양잇과 동물들의 표정을 알아본다. 본래 영상물을 거의 보지 않았는데, 동물 다큐멘터리는 끝까지 본다. 다른 집 반려동물 사진을 보려고 SNS를 한다. 아파트에 살아 개를 키울 수 없지만, 보호소에 사는 대형견들의 대모가 되었다. 희한하게도, 사람 아기도 귀여워졌다. 새벽에도 놀아 달라, 밥 달라, 화장실 치워 달라고 큰 소리로 울부짖는 고양이를 키우다 보니, 사람 아기를 보아도 애틋하다. 긴 여행이나 출장을 꺼린다. 때때로 사람들의 옷에 붙은 동물 털을 알아보고 미소 짓는다. 자수가 취미였는데, 둘째 고양이가 실을 자꾸 따라다니는 바람에, 둘째 고양이가 잘 때만 수를 놓는다.

얼마 전, 한밤중이었다. 화장실을 다녀오다 거실 한쪽 캣타워에 고양이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첫째 고양이가 가끔 몸을 도르르 말고 자는 자리였다. “아유, 여기서 자고 있었어?”하고 눈을 비비며 다가가 보니 아무도 없었다.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온 가로등 불빛과 심한 근시, 잠기운에 잘못 본 것이었다.

고양이가 있는 줄 알았는데 없었던 자리에 서서, 문득 생각했다. 아, 언젠가는 이렇게, 없는 고양이를 집안 곳곳에서 발견하는 날이 오겠구나. 고양이를 보았다고 착각했다가, 그와 거의 동시에 어디를 찾아도 그 고양이는 이제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무런 생기도 없는 가구를 가만히 바라보는 날들이 있겠구나. 아주 오랫동안, 아마 잠시 함께 산 기간보다 훨씬 오랫동안, 그런 날들을 수시로 만나겠구나. 그 착각은 언제나 이처럼 스산하겠지.

고양이는 제가 좋아하는 다른 자리에 곤히 잠들어 있었다. 나는 익숙한 거실에 서서, 자다 깬 눈으로 조금 울었다.

정소연 SF소설가ㆍ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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