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미중 대립 국면에 되새길 1ㆍ21 사태

입력
2018.11.03 04:4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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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 다가오는 미중 신냉전 기류 

 한미 모두 신중한 동맹 관리 필요해 

 미국 최근 행보 반미여론 자극 우려 

미중 대립으로 유명세를 탄 이가 그레이엄 엘리슨이다. 하버드대 교수인 그는 1년 전 자신의 책에서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란 말로 미중 전쟁 가능성을 언급해 국제적인 논쟁을 일으켰다.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2,400년 전 전쟁 이래로 패권국이 걸었던 예정된 길을 미중이 가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1년이 지난 지금 엘리슨은 볼륨을 더 올려, 전쟁 위험이 높아졌다고 주장한다. 확률 50% 미만이긴 하나 가능성은 실재한다는 것이다.

엘리슨처럼 미중 대립이 무역전쟁을 넘어선 것으로 보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지난달 4일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의 대중국 연설을, 냉전시대를 초래한 외교관 조지 캐넌의 소련 봉쇄 주장에 빗대는 이들도 있다. 협상은 종말을 고했고, 이제 신냉전의 시작이란 얘기다. 시사주간 이코노미스트도 최근 커버 스토리에서 양국 관계가 공존 모색에서 헤게모니 경쟁으로 전환됐다고 진단했다. 무엇보다 진보, 보수를 가리지 않고 미국인들의 중국 인식이 바뀌고 있다. 시진핑 중국 주석이 트럼프 대통령과 전화통화에서 무역 갈등을 원치 않는다고 했지만, 미국 입장에서는 쓸 카드가 소진된 중국의 하소연으로 들릴 뿐이다.

미중 대립시대가 한반도에 가져올 변화가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남북은 관계를 개선하고 있다. 많은 관심과 시선들이 남북 내부로 향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남북의 의지와 무관하게 한반도 주변을 서성이는 힘은 여전하다. 미국은 9월 평양정상회담에 참석한 우리 대기업들에 전화를 걸어 경협 추진 상황을 파악해 주권 침해 논란을 일으켰다. 국내 은행들에도 ‘오해 살 일을 하지 말라’며 남북 경협 속도 조절을 협박하듯 요구했다. 달러 결제권을 지닌 미 재무부의 제재 대상에 오르면 금융기간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머잖아 미중 대립 현안에서 선택을 강요하기에 앞선 예고전 같은 모습이다.

미국의 월권에 우리 정부는 못 본 채 침묵하고 있다. 남북이 긴장관계이던 작년 7월 문재인 대통령의 말은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여준다. “우리가 뼈저리게 느껴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절박한 한반도 문제인데도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해결할 힘이 있지 않고, 우리에게 합의를 이끌어 낼 힘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해도 동맹 관계에서 이런 일이 잦아지면 여론의 역풍을 피하기는 어려워진다. 과거에도 미국은 동맹관리에 실패해 반미 여론을 자극한 전과가 없지 않다.

문 대통령이 출입기자들과의 산행에서 북악산에 얽힌 이야기를 하던 중 꺼낸 1ㆍ21 사태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반세기 전의 1ㆍ21 사태는 엉뚱하게 한미 관계에 불똥이 튀어 작지 않은 생채기를 남겼다. 1968년 1월 휴전선을 넘은 북한 특수부대원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해 대통령 박정희를 암살하려 했다. 21일 시작된 이들과의 전쟁 같은 총격전은 열흘을 넘겨 31일까지 계속됐다. 김일성의 박정희 위해 시도로 국내 분위기가 어떠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사건 발생 48시간이 지나지 않은 23일 이번에는 북한이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를 나포하면서 한반도는 그야말로 전쟁 위기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총격전의 와중에 북미가 판문점에서 비밀협상을 벌여 푸에블로호 해법을 논의하자 한국은 충격에 휩싸였다. 1ㆍ21사태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동맹국 미국이 푸에블로호 사건에는 항모를 2척이나 동해에 긴급 배치하더니, 한국을 배제하고 직접 협상까지 벌인 때문이다. 격해진 박정희 정부는 대북 단독 보복을 경고했고, 여론은 반미로 치달았다. 이에 놀란 존슨 미 정부는 특사를 보내, 추가적인 군사지원을 약속한 ‘반스 각서’를 쓰고서야 한국을 겨우 말릴 수 있었다.

냉전시대 한 고비였던 1ㆍ21사태는 동맹이 자국의 이익이 걸린 문제에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교훈으로 남아 있다. 미국에는 위기의 순간 자국 이해만 앞세운다면 동맹 관리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비싼 경고였다. 미중 대립 국면에서 한미 양국이 그때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이태규 뉴스1부문장 tglee@hankookilbo.com

이태규 뉴스1부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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