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 포퓰리즘의 항체를 만들자

입력
2018.10.29 20:00
수정
2018.11.01 19:44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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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르 보우소나루 브라질 대통령 후보 지지자들이 28일밤 대선 승리결과가 발표되자 환호하고 있다. 브라질리아=AP 연합뉴스
자이르 보우소나루 브라질 대통령 후보 지지자들이 28일밤 대선 승리결과가 발표되자 환호하고 있다. 브라질리아=AP 연합뉴스

남미 최대 국가인 브라질에서 권위주의적인 포퓰리스트가 대권을 거머쥐었다. 자이르 보우소나루 사회자유당(PSL) 후보가 28일 치러진 대선 결선에서 55%를 득표해 대통령에 당선된 것. 복지확대와 친기업 정책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룰라 전 대통령의 리더십 덕택에 10년 이상 남미 중도좌파의 맏형 노릇을 하며 불패신화를 이어갈 것 같던 브라질노동자당(PT)도, ‘브라질을 지키는 군인’을 자처한 이 포퓰리스트의 공세 앞에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에 이어 브라질의 보우소나루까지 이제 어느 대륙도 포퓰리스트들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된 셈이다.

포퓰리스트들이 등장하는 과정은 여러모로 비슷하다. 이들은 복잡한 문제들을 간단명료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민자들이 대거 들어온다고 하면 장벽을 쌓자고 하고, 이슬람의 이름으로 테러리스트들이 테러를 시도하면 무슬림 활동을 금지하자고 하는 식이다. 보우소나루는 심지어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포기’ 같은 공약까지 냈다. 경제불황의 원인이 온전히 좌파의 집권 때문인 양 책임을 전가한 것이다. 팍팍해진 현실 문제의 진짜 원인을 따지는 일이 성가신 유권자들에게 이들의 주장은 당의(糖衣)를 입힌 독약처럼 솔깃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자신만이 국민의 진정한 대변자라고 강변하면서 소수자들을 국민에서 배제시키려는 것도 포퓰리스트들의 공통전략이다. 이민자, 난민, 특정 종교집단, 때로는 성소수자(LGBT)까지 국민에서 제외된다. 아프리카 출신 이민자들을 향해 “거지소굴 같은 나라에서 온 사람들”(트럼프)이라고 비난하거나, “아들이 동성애자라면 매질을 덜했기 때문”(보우소나루)이라는 막말은 분명히 정치적으로 옳지 않다. 하지만 세계화의 광풍 속에 일자리를 잃고 정체성 상실감에 빠진 남겨진 자들(left-behinds)에게 이런 발언은 자신이 ‘국민’이라는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안정감을 준다. 이런 ‘배제의 레토릭’은 2016년 미국에서 전통적인 블루스테이트(민주당 지지주)로부터 트럼프의 몰표를 유도했고, 올해 브라질에선 룰라를 찍었던 유권자들이 보우소나루를 지지하게 하는 요술을 부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공동체가 치러야 할 대가는 크다. 반대 진영과의 공존이라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흔들 뿐 아니라, 최악의 경우 국민의 경계 밖으로 밀어버린 집단에 대한 폭력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지난주 민주당 인사들을 겨냥한 공화당을 지지하는 남성의 파이프폭탄 배달사건, 유대인들을 겨냥한 백인 남성의 총기난사 사건이 벌어지자 미국 언론들이 트럼프의 책임을 물은 건 그런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권위주의적 포퓰리스트들의 등장을 막고 건강한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을까. 포퓰리즘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연구한 미국 정치학자 야스차 뭉크는 한국인들이 촛불집회를 통해 권위주의적인 지도자를 끌어내린 일이 전세계 자유민주주의자들에게 영감을 줬다고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안심하기는 이르다. 군부독재와 전체주의체제에서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벗어나 공고한 민주화 단계에 진입했다고 평가받던 폴란드, 필리핀, 브라질이 순식간에 포퓰리즘 광풍에 휩쓸린 걸 보면 민주주의 역진 가능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예멘 난민 사태에서 드러났던 이주자에 대한 배타성, 여성과 특정지역에 대한 조롱을 일삼는 극우 인터넷 커뮤니티의 흥기 등의 현상은 혐오를 숙주로 하는 포퓰리즘의 공세가 가랑비처럼 우리 사회에 스며들 수 있다는 우려를 더하게 한다. 가짜 민주주의자를 분별해낼 수 있는 지혜, 권위주의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경계 등 포퓰리즘에서 우리 사회를 지키기 위한 항체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때가 지금이다.

이왕구 국제부 차장 fab4@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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