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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3일 오후8시(현지시간) 미국 뉴욕 시티필드. 플로리다주에서 왔다는 제이미(17)와 엘리나(20) 등 6명은 텐트 옆에서 버너로 음식을 데우고 있었다. 사흘 뒤인 6일에 열릴 아이돌그룹 방탄소년단을 좀 더 앞에서 보기 위해 공연장 인근에서 노숙하며 입장을 기다리는 미국 관객들이었다.

‘방탄소년단 리더 RM의 유엔 연설이 어땠냐’는 질문으로 ‘아미(방탄소년단 팬덤ㆍA.R.M.Y.)’에게 아군 인증을 받고 그들의 경계를 풀었던 것도 잠시. “집에 뭐라고 하고 왔어요?” 질문을 건네자 달아올랐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아차 싶었던 건 그들의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을 보고 난 뒤였다. 너무 ‘한국적인’ 질문을 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아서였다.

제이미 등은 1일부터 텐트촌 생활에 들어갔다고 했다. 공연까지 무려 5일을 밖에서 자야 했다. 걱정도 되고 해서 ‘너희 부모님이 반대하지 않았어?’란 취지로 물었으니 독립적으로 자란 그들 눈엔 당황스러울 수밖에. 12시간 비행기를 타고 뉴욕까지 날아가 ‘한국 꼰대’ 인증을 하고 온 셈이다.

방탄소년단의 미국 팬들이 텐트까지 치고 공연을 기다릴 정도로 그들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결국 곡에 담긴 ‘메시지’였다. 20여 관객들에게 다른 K팝 아이돌그룹과 달리 방탄소년단을 좋아하는 이유를 묻자 돌아온 답변이었다. 일부러 K팝 주 소비층이 아니었던 백인 관객들만 찾아가 물었는데 한 명도 예외는 없었다. 모두 가사 내용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들은 포털사이트에서 번역기를 돌리거나 유튜브에서 영어로 곡 해석이 담긴 동영상을 찾아보며 노래를 공부한다고 했다. 비욘세부터 저스틴 비버까지. 영어로 노래하는 팝스타들이 넘치는 데 수고로움을 감수하며 방탄소년단의 음악을 찾아 듣는 이유가 세련된 뮤직비디오와 노래, 절도 있는 군무 때문 만은 아니었다. 버지니아주에서 왔다는 에이전(18)은 방탄소년단이 “우리의 삶을 얘기해 좋다”고 했다. 마약과 사랑 그리고 돈 자랑만 하는 노래가 아니라 좋단다. 미국에서는 방탄소년단처럼 교육 문제나 청춘의 성장통을 현실감 있게 다룬 가수들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청춘을 향한 방탄소년단의 ‘뜨거운 언어’가 미국 주류 문화의 장벽을 허문 것이다.

한데 정작 국내로 눈을 돌리면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SMㆍJYP엔터테인먼트 등은 새로운 K팝 한류 전략으로 ‘외국인 연습생 육성, 현지 데뷔’를 내세운다. 그 일환으로 SM은 이르면 다음 달 ‘NCT차이나’를 론칭한다. 중국인으로만 구성된 그룹으로 한한령으로 막힌 K팝 한류를 뚫어보겠다는 각오다. JYP도 내년 말 데뷔를 목표로 일본인 멤버로만 꾸려진 걸그룹을 기획하고 있다. 외국인 멤버가 꼭 있어야 해외에서 인기를 얻을 수 있을까. 음악과 메시지에 끌리지 않는데 같은 국적이라서 마냥 좋아할 리 없다. 국내 주요 대형 기획사들의 K팝 전략 수정이 필요해 보이는 이유다. 미국인들이 방탄소년단의 한국 노래를 직접 수입해 듣고 열광하는 시대엔 말이다.

기획 상품 취급 받는 K팝의 활로는 생명력 찾기다. 청취자들이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2년 전, 정유라의 이화여대 부정입학 규탄 시위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시위 현장에서 20, 30대는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며 연대를 확인했다. 노랫말에 담긴 보편적 희망의 서사 덕분이었다.

K팝도 시대의 노래가 될 수 있다. “빨간 맛 궁금해 허니”(레드벨벳) 같은 노랫말로 방탄소년단의 다음을 기대하긴 어렵다. 미국 청년들도 청춘의 서사에 목말라 있다. 그룹 멤버 국적의 다양성이 아니라 곡에 어떤 메시지를 담을 지를 고민해야 할 때다. ‘뭣이 중헌디!’. K팝 시장을 보며 ‘곡성’의 명대사가 맴도는 건 영화가 그리워서만은 아닐 게다.

양승준 문화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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