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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전 대법원장.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난 주말 ‘추리소설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원작으로 해 만든 동명의 영화를 봤다. 추리소설에 탐닉했던 중학생 때 이미 읽었지만, 화려한 출연진에 이끌려 보게 됐다. 아, 미셸 파이퍼는 사랑이다!

14명의 승객이 터키 이스탄불에서 프랑스 칼레로 향하는 특급 열차를 타고 가던 중 한 명이 살해됐다. 외부인의 범행일 가능성은 제로. 전형적인 밀실 살인 사건이다. 벨기에 출신 명탐정 ‘회색 뇌세포’ 에르큘 포와로가 사건을 의뢰 받아 승객들과 면담을 하지만 모두 알리바이가 있다.

범인은 누구일까. 승객 모두가 수상하다. 포와로는 제한된 단서들로부터 승객들의 이력을 유추해 내고, 그들이 아동 유괴살인 사건 피해자와 관계가 있다는 공통점을 밝혀낸다. 살해된 사람은 아동 유괴범이었고 유괴된 아이, 그 부모와 끈끈한 관계였던 승객들은 복수를 위해 살인을 모의한 것이다. 포와로는 결론을 내린다. “모두가 범인이다.” 법률상 용어로 공모공동정범이다. “옳고 그른 것이 있을 뿐 그 중간은 없다”(There is right, there is wrong. There is nothing in between)고 했던 포와로이지만, 전모를 밝혀내고선 “이 사건의 정의는 무엇인가. 법으로도 부족할 때가 있다”며 사건을 덮는다.

아직 소설이나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에게 흥취를 반감시킬 ‘스포일러’(Spoiler)를 유포한 데 대해 사죄한다. 스포일러는 ‘망치다’는 뜻을 가진 ‘spoil’의 파생어로 소설ㆍ영화 등의 핵심적인 줄거리나 반전을 알려 재미를 망친다는 뜻이다. 현실 세계엔 ‘망치는 사람(것)’이라는 본래 의미의 스포일러가 있다. 구체적으론 법원, 아니 삼권분립 스포일러다.

살인 사건은 아니지만,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의 사법농단 의혹 사건 수사 과정에서 드러나는 일련의 정황들과 영화 속 사건은 닮아 있다. 모두의 책임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보스급 스포일러다. 상고법원 설치를 위해, 모시는 대법원장의 뜻을 이루기 위해(대법관 승진도 염두에 뒀겠지만) 했던 일들이 알려지고 있다. 정보기관을 방불케 하는 정보 수집, 반대 세력 회유와 압박, 법원에 불리한 사건에 대한 재판 개입, 법관 해외 파견 같은 목적 달성을 위한 재판 거래 등 지금까지 드러난 의혹만 십여 가지다.

오롯이 그들만의 책임인가. 법원행정처에서, 대법원에서 심의관으로 재판연구관으로 근무했던 판사들은 정말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을까. 재판거래가 명백해 보이는 문건들을 작성하면서, 수사와 관련한 내용들을 보고하면서, 자신이 맡은 재판을 지침대로 처리하면서, 거리낌이 없었을까. 그들의 도구였다고 할지 몰라도 눈 감아버린 건 아닐까. 자체 진상조사에서 제대로 문제를 짚어내지 못한 조사단, ‘방탄 판사단’이라는 오명이 지워진 영장전담 판사들은 책임에서 자유로운가. 한 지방법원의 부장판사는 “나한테도 재판 관련 수사 상황이 파악된 걸 보고하라 했거나 연구관, 심의관으로 발령 내고 무엇인가 시켰으면 일단 했을 것 같다”고 했다.

법원만 손가락질을 받아야 하는가. 그들에게 민원을 넣어왔던 정치인, 청와대 등의 권력기관, 언론 등은 책임이 없나. 자신들의 정치적 이념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추진하던 정책에 배치된다는 이유로, 때로는 사사로운 이해관계를 이유로 뒤로 들어오는 수많은 민원들을 보면서 그들이 민원의 대가로 원하는 것을 이뤄야겠다는 흑심을 키웠을지 모른다.

사법농단 관계자들이 법적 책임을 지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오리엔트 특급 살인’처럼 전모는 밝혀져야 한다. 구속 혹은 불구속, 유죄 또는 무죄의 문제를 떠나서 사법농단은 재발해선 안 된다. 진실을 마주해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 망가진 법원 신뢰를 되살릴 첫걸음이다.

안아람 사회부 기자 onesho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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