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식하기 좋은 곳… '용산의 먹자 섬' 열정도 아시나요?

입력
2018.10.17 04:4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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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치 있는 문구와 아기자기한 인테리어의 가게들이 열정도에 활기를 더한다.
재치 있는 문구와 아기자기한 인테리어의 가게들이 열정도에 활기를 더한다.

지난 11일 오후 8시. 서울 용산구 백범로의 인쇄소 골목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낮에 한적했던 골목은 하룻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풀려는 직장인들로 가득 차면서 이내 떠들썩해졌다. 고층 주상복합건물 사이 숨어 있는 허름한 골목은 도심 속에 떠 있는 외딴 섬과도 같다. 그래서 골목의 이름은 ‘열정도’다. 도시의 후미진 곳이지만, 열정으로 가득 찬 섬이란 뜻을 지녔다.

원래는 인쇄소와 출판사, 작은 공장들이 모여 있던 골목이다. 잉크 냄새가 진동하며 제법 북적거렸던 이 곳은 인쇄업이 사양산업이 되고 재개발까지 무산되면서 텅 빈 거리가 됐다. 인근에는 아파트와 고층빌딩이 들어섰지만 인쇄소 골목은 버려진 공간 취급을 받으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혀져 갔다.

2014년 골목은 뜨거움을 되찾기 시작했다. 20대 청년들이 오래된 건물을 개조해 작은 가게를 운영하면서 활기를 다시 띠었다. 개성 있는 가게가 하나 둘 늘어나더니 용산에서 출퇴근하는 직장인들이 즐겨 찾는 회식 장소가 됐다.

하늘에서 바라본 열정도. 높은 고층 빌딩 사이 외딴 섬처럼 남겨졌다. 청년장사꾼 제공
하늘에서 바라본 열정도. 높은 고층 빌딩 사이 외딴 섬처럼 남겨졌다. 청년장사꾼 제공
도심 속 작은 골목 열정도는 인근 고층빌딩과 달리 키 작은 건물들이 어깨를 기대듯 이어지며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청년장사꾼 제공
도심 속 작은 골목 열정도는 인근 고층빌딩과 달리 키 작은 건물들이 어깨를 기대듯 이어지며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청년장사꾼 제공

 회식이 즐거워지는 골목 

열정도는 지하철 1호선 남영역, 6호선 효창공원역 사이에 있다. 4·6호선 삼각지역과도 가까워 교통이 편리하다. 이날 퇴근길에 찾아가 본 열정도는 아기자기한 인테리어를 갖춘 가게들이 모여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거리 곳곳이 카메라 셔터만 눌러도 그럴싸한 사진이 나올 듯한 분위기였다. 중심 거리 옆으로 가지처럼 뻗어있는 작은 골목 안에는 커피숍, 공방 등이 들어차 있다. 골목마다 어떤 가게가 들어있는지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얼핏 보면 요즘 20대 사이에서 ‘데이트 성지’로 부상한 서울 문래동 공장지대 문화예술촌이나 을지로3가 인쇄골목을 닮았다. 하지만 열정도에는 열정도만의 분위기가 있다. 좀 더 활기차고 자유분방하다. 가게 직원은 길거리에서 행인들과 농담을 주고받다가도 가게에 들어오는 손님을 향해선 힘찬 목소리로 인사한다. 손님들을 단골로 붙잡으려는 적극성이 느껴진다. 열정도에서 치킨을 파는 ‘치킨혁명’의 청년 상인 이호경(29)씨는 “무뚝뚝한 어른들도 아들 같아 보이는지 꼬박꼬박 인사하는 것만으로도 예뻐해 주신다”며 “장사꾼 대부분이 청년이라 손님에게 거리낌 없이 다가가는데 이런 문화가 거리에 녹아 든 것 같다”고 했다. 2014년부터 열정도의 부활을 지켜 봐 온 사업가 김연석(37)씨는 “청년들이 도움의 손길 없이 치열하게 장사를 준비해 골목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며 “그래서인지 여느 골목보다 생동감 있고 의욕적인 에너지가 넘친다”고 말했다.

골목을 찾는 손님들은 주로 직장인과 인근 거주민이다. 주말에는 20대 손님들이 데이트를 즐기기도 하지만, 평일에는 30대 손님들이 소란스러운 거리를 피해 열정도에서 회식을 즐긴다. 그래서 가게들의 메뉴는 거창하지 않다. 삼겹살, 치킨, 곱창, 감자튀김, 커피 등 어디서든 접할 수 있는, 평범하면서도 친근한 음식이 대부분이다.

금융회사에 근무하는 김효종(37)씨는 이날 8명의 부서원들과 열정도를 찾았다. 그는 며칠 전 우연히 열정도에 들렸다가 독특한 분위기에 매료돼 동료들과 다시 이 골목을 찾았다. “열정도에 있는 가게들은 메뉴가 겹치지 않고 종류가 다양해 회식하기 좋아요. 1차부터 3차까지를 골목 안에서 다 해결할 수 있거든요. 젊은 에너지가 넘치면서도 어른들이 선호할 음식도 많아 20대 막내 직원부터 50대 부장까지 여러 세대를 아우를 수 있습니다.”

열정도가 생기기 전 서울 용산구 원효로의 인쇄소 골목. 텅 비었던 이 거리는 4년 만에 손님들로 활기를 띠는 열정도로 거듭났다. 청년장사꾼 제공
열정도가 생기기 전 서울 용산구 원효로의 인쇄소 골목. 텅 비었던 이 거리는 4년 만에 손님들로 활기를 띠는 열정도로 거듭났다. 청년장사꾼 제공
열정도는 골목 사이사이 작은 가게를 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열정도는 골목 사이사이 작은 가게를 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청년장사꾼은 어떻게 열정도에 모여들었나 

2014년 12월 자본금이 부족한 청년들이 모여 가게 6곳의 문을 연 것이 열정도의 시작이다. 이들은 직접 공사하고 도색 작업을 하며 자본금을 줄였다. 가게는 구색을 갖추게 됐지만, 어둡고 낙후된 골목을 찾는 이들이 없었다. 사람들에게 열정도의 존재를 알려야 했다.

김연석씨는 “가로등도 거의 없어 밤에는 주민들도 지나다니지 않는 길이었다”며 “점심시간 인근 역에서 열정도에 관한 전단지를 뿌리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등을 통해 홍보하며 우리가 있다는 걸 알렸다”고 했다.

1년간 가게 대부분이 적자였으나 몇몇 방송 매체에 청년 상인들의 사연이 소개되며 거리를 찾은 손님이 늘기 시작했다. 늘 밝고 쾌활한 모습으로 손님의 기분을 좋게 하니 다시 방문하는 경우가 늘었다. 입소문을 타면서 다른 청년 상인들도 골목에 자리를 잡아갔다. 6개로 시작한 가게는 이제 40여개로 늘어났다.

열정도의 등장을 모두가 반긴 건 아니다. 도시기능이 바뀌면서 골목에 거주하던 몇몇 거주민들이 불편을 호소한 것. 한 가게는 풍향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환기구를 설치했다가 조리 연기가 주택으로 들어온다는 거주민의 항의에 환기구를 다시 설치하는 실수를 하기도 했다. 식당이 생기면서 발생하는 오염이나 소음은 열정도의 모든 청년들이 풀어야 할 숙제다.

곱창집 ‘곱상’의 상인 김현우(27)씨는 “오래 거주하신 어른들을 길에서 만나면 밝게 인사하며 정을 쌓고 있다”며 “어른들이 거주하는 골목에 손님들이 들어가지 않도록 양해를 구하는 등 배려하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치킨혁명’의 이호경씨는 “거리 모습이 우리 얼굴인 것 같아 우리 가게뿐 아니라 옆 가게까지 매일 청소하며 깨끗한 거리를 유지하려 한다”고 말했다.

열정도가 언제까지 열정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구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도 있다. 열정도 주변에서 거주하는 김의준(가명·41)씨는 “이 골목도 언젠간 재개발될 가능성이 있지 않겠느냐”면서 “청년들이 생존하려면 (사업의) 방향이나 인프라 구축에 관한 고민을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열정도 야시장에서 열린 플리마켓. 청년장사꾼 제공
열정도 야시장에서 열린 플리마켓. 청년장사꾼 제공

 야시장까지… 노는 재미를 주는 골목 

열정도를 더 생기 넘치는 골목으로 만드는 것은 골목의 특징을 활용한 여러 이벤트다. 대표적인 것이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에 열리는 ‘열정도 야시장’ 행사다. 골목 전체가 한마음이 돼 웃고 즐기는 축제의 자리가 된다. 버스킹 밴드를 섭외해 거리 공연을 펼치거나 플리마켓을 열어 여느 때보다 쾌활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열정도 야시장’은 3월부터 10월까지 열린다.

27일 올해 마지막으로 열릴 ‘열정도 야시장’은 할로윈을 콘셉트로 정했다. 가게마다 직원들이 할로윈 분장을 하고 골목을 찾는 손님들과 포토존 골목에서 사진도 찍는다. “지난해 할로윈 파티 때는 거주민들이 많이 찾아왔어요. 할로윈 분장을 한 애기가 젊은 부부와 함께 거리를 찾아 추억을 쌓기도 했죠. 의상, 분장 등을 준비하려면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데, 그만큼 보람이 있더라고요.”(‘곱상’ 청년 상인 김현우씨)

21일 경찰의 날을 맞아 작은 이벤트도 준비 중이다. 열정도는 인근에 서울용산경찰서를 끼고 있어 경찰들도 자주 찾는다. 경찰의 날 전날 30%, 당일 50% 음식을 할인 판매하는 이벤트를 기획 중이다. 일주일간 열정도를 찾는 손님들에게 일일이 메시지를 받아 이를 경찰에게 전달하는 이벤트도 준비한다. ‘쭈꾸미를 너무 많이 죽인 살인죄’, ‘고기 육즙을 너무 잘 가둔 감금죄’ 등 재치 있는 홍보 문구로 포스터도 제작할 예정이다. 경찰의 날 이벤트는 최근 열정도 청년 장사꾼끼리 모인 반상회에서 나온 아이디어다.

이호경씨는 “골목 전체가 하나되고 통일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열정도의 매력”이라며 “이 곳 청년 상인 모두 열정도를 어떻게 살릴지 한마음으로 고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김현우씨는 “거리를 찾는 손님과 꾸준히 소통하고 교감하는 골목으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나가고 싶다”고 전했다.

이소라 기자 wtnsora2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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