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재학 칼럼] 서울은 만원이다

입력
2018.10.15 15:23
수정
2018.10.15 18:17
30면

세계 최고 과밀 도시에 또 공급 확대

서울 중심주의 탈피 못하면 백년하청

국토균형발전ㆍ생태도시가 근본 해법

서울은 만원이다. 작가 이호철이 ‘서울은 만원이다’라는 소설을 쓴 52년 전에도 서울은 만원이었다. 해방 직후 100만명 선이던 서울 인구는 88년 1,000만명을 넘어섰다. 서울이 감당을 못하자 1기, 2기 신도시가 만들어졌다. 그래도 수요를 충족하기 어려우니 그린벨트를 풀어 강남에 미니신도시를 만들고 서울 인근에 3기 신도시를 만들겠단다. 서울을 향한 부동산 탐욕을 채우려면 서울이 몇 개 있어도 모자랄 게다. 사진은 서울 광화문사거리에서 시민들이 옷깃을 여민 채 출근하는 모습. /배우한 기자
서울은 만원이다. 작가 이호철이 ‘서울은 만원이다’라는 소설을 쓴 52년 전에도 서울은 만원이었다. 해방 직후 100만명 선이던 서울 인구는 88년 1,000만명을 넘어섰다. 서울이 감당을 못하자 1기, 2기 신도시가 만들어졌다. 그래도 수요를 충족하기 어려우니 그린벨트를 풀어 강남에 미니신도시를 만들고 서울 인근에 3기 신도시를 만들겠단다. 서울을 향한 부동산 탐욕을 채우려면 서울이 몇 개 있어도 모자랄 게다. 사진은 서울 광화문사거리에서 시민들이 옷깃을 여민 채 출근하는 모습. /배우한 기자

“서울은 넓다. 아홉 개의 구(區)에 가(街), 동(洞)이 대충 잡아서 380개나 된다. 이렇게 넓은 서울도 370만명이 정작 살아보면 여간 좁은 곳이 아니다. 가는 곳마다, 이르는 곳마다 꽉꽉 차 있다. 집은 교외에 자꾸 늘어서지만 연년이 자꾸 모자란다. 일자리는 없고 사람들은 입만 까지고 약아지고 당국은 욕사발이나 먹으면 낑낑거리고 신문들은 고래고래 소리나 지른다.”(1966년 이호철 소설 ‘서울은 만원이다’에서)

52년 전에도 서울은 만원이었다. 교통지옥에다 산 꼭대기까지 판잣집으로 뒤덮일 만큼 주거난이 심했다. 해방 전후 100만명 선이던 서울 인구는 1963년 300만명, 70년 550만명, 88년 1,000만명을 넘어섰다. 서울은 더 커졌고 혼잡도 심해졌다. ‘만원’을 넘어 ‘초만원’이다. 서울이 감당을 못하자 1기, 2기 신도시가 생겼다. 이제 국민 절반이 서울과 수도권에 산다. 도시국가를 제외하곤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수도권 집중이다.

16년 전 미국 뉴욕에서 1년을 살았다. 뉴욕 맨해튼은 마천루의 숲이다. 미국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다. 섬이라는 지리적 제약 탓에 고층 개발이 불가피했다. 정치 중심지는 백악관과 의사당이 있는 워싱턴이다. 세계 최고의 암전문 병원 MD 앤더슨은 휴스턴에, 올해 미국 대학순위 평가 1위에 오른 하버드대는 보스턴에 있다. 뉴욕에 있는 10위권 대학은 컬럼비아대가 유일하다. 나머지 명문대는 지방 소도시 등에 흩어져 있다. 미국에서 사상 처음 시가총액 1조달러를 돌파한 애플의 본사는 실리콘밸리에, 두 번째 시총 1조달러 기업인 아마존 본사는 시애틀에 있다. 소도시나 시골에 산다고 뉴욕 시민을 부러워하지는 않는다.

서울은 ‘특별한’ 도시다. 청와대, 국회, 대법원 등 핵심 국가기관이 집중돼 있다. 한국 최고의 대학과 최고의 병원과 최고의 기업과 최고의 쇼핑센터와 최고의 공연장과 최고의 부자들이 몰려 있다. 전국의 자원과 인재와 돈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도시다. 서울 집중이 가속화하면서 지방은 소멸 위험에 놓였다. 30년 안에 전국 시ㆍ군ㆍ구 중 40%가 사라질 운명이다. 지방 교육ㆍ의료 중심지였던 명문 국립대와 부속병원은 이미 삼류로 전락했다. 그러니 인구의 절반이 열등의식에 젖어 살아간다.

서울 집값을 잡기 위해 다양한 공급 확대 방안이 거론된다. 정부는 그린벨트를 풀어 아파트 공급을 늘리겠단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종로구, 중구 등 도심에 높은 층수의 주상복합빌딩을 많이 지어 주택을 공급하는 계획을 내놓았다. 여의도를 통으로 재개발해 맨해튼처럼 만들겠다고도 했다.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는 용산 미군기지 이전지와 공공기관이 소유한 수도권 골프장에 임대주택을 공급하자는 등의 아이디어가 쏟아진다.

한국에선 집과 토지의 가치가 사람의 가치를 좌우한다. ‘서울’‘강남’‘고층아파트’는 계층과 서열을 나누는 상징이다. 서울 강남은 특별시민, 강북과 수도권은 2등 시민, 기타 지역은 3등 시민이다. 한국은 ‘지방대 교수’ ‘지방병원 의사’라는 용어가 존재하는 유일한 나라다. 서구에서 아파트는 빈민층이 주로 사는 주택의 한 유형이지만, 한국에선 계층 상승의 중요한 통로이자 중산층 주택의 표준이다. 특히 ‘강남 아파트’는 금수저 공간의 대표주자다. 수요가 있으니 공급을 늘려야 한다고? 집과 땅이 재산 증식과 투기 대상으로 인식되는 한, 서울 중심주의를 외면한 채 부동산 탐욕을 막을 방법은 없다.

문학비평가 르네 지라르의 욕망 이론에 따르면, 인간에겐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질시하는 ‘모방 욕망’이란 게 있다. 이 욕망이 투영된 대표적 현상이 부동산 투기다. 주택을 통한 한국인의 자산 증식 욕망은 가히 사회적 광기 수준이다. 지방민 상당수가 지금 이순간에도 호시탐탐 서울 진입을 노린다. 서울에 살기는 싫어도 집을 갖고는 싶어한다. 서울 집값이 치솟을 때마다 전 국민이 불안과 공포에 떠는 이유다. 탐욕적 자본을 닮아 가는 삶의 행태를 바꾸지 않으면 아무리 공급을 늘려도 서울은 만원일 수밖에 없다.

고재학 논설위원 겸 지방자치연구소장 goind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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